[미디어스=전혁수 기자] 일본 정부·언론은 한국이 대량 살상무기 전용이 가능한 전략물자를 유출했다며 경제보복의 근거로 삼고 있다. 한국 정부가 반박을 제기하는 가운데 정작 일본 측 주장의 빌미를 제공한 조선일보는 정부 대응에 찬물을 끼얹는 모양새다. 조선일보는 자신의 보도를 일본 정부·언론이 받고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반박하자, 전략물자 북한 유출 의혹의 책임을 한국 정부에 돌리고 있는 셈이다.

일본 정부가 한국을 상대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등의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등 경제 보복에 나서고 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한국대법원의 배상판결이 나온 지 8개월여 만이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리지스트, 고순도불화수소 등에 대해 수출 절차를 간소화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화이트 국가' 대상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것이다.

▲MBC 뉴스데스크 자료화면.

일본은 한국이 대량살상 무기의 소재가 될 수 있는 불화수소를 불법 수출했다며, 자국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 여기에 근거로 사용된 것이 조선일보 보도다. 9일 후지TV에 출연한 오노데라 이쓰노리 일본 자민당 안보조사회장은 "조선일보 기사 중에 올해 5월이라고 보고 받았습니다만, 대량 파괴에 전용 가능한 전략물자가 한국에서 위법으로 유출되는 게 급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지난 5월 17일 <대량 살상무기로 전용 가능한데…한국, 전략물자 불법수출 3년새 3배> 기사를 게재했다. 조선일보는 "미사일 탄두 가공과 우라늄 농축장비 등으로 전용될 수 있는 국내 생산 전략물자가 최근 대량으로 불법 수출되고 있는 것으로 16일 나타났다"며 "대량살상무기 제조에 쓰일 수 있는 우리 전략물자가 제3국을 경유해 북한이나 이란 등으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5월 17일자 조선일보 10면 기사.

조선일보 보도의 근거는 '친박' 조원진 우리공화당 의원이 제출받은 자료다. 조 의원은 산업부에 2015년부터 2019년 3월 말까지 무허가 수출 적발 및 조치 현황을 요구했고, 산업부는 이를 조 의원에게 제출했다.

후지TV는 10일자 보도에서 "한국 정부에서 작성한 '전략물자 무허가 수출 적발 현황'을 단독으로 입수했다"고 했다. 후지TV는 "한국에서 무기로 전용 가능한 전략물자가 밀수출된 안건이 4년간 156건이나 된다"며 "한국의 수출관리 체제에 의문부호가 붙는 실태가 엿보인다"고 보도했다. 후지TV는 "북한이 김정남을 암살할 때 사용된 신경제 'VX'의 원료가 말레이시아 등에 수출됐으며, 일본의 수출 규제 강화 조치 대상인 불화수소도 아랍에미리트 등에 밀수출됐다"고 했다.

일본 국영방송 NHK는 "한국 기업이 사린가스 등 화학무기 제조에 전용할 수 있는 에칭가스(불화수소)를 생산하는 일본 회사에 납품을 재촉하는 등 안보상 부적절한 사례가 다수 있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사린가스는 일본 국민들의 뇌리에 공포로 각인될 수 있는 물질이다. 1995년 옴진리교가 도쿄 전철역에서 사린가스 테러를 벌여 13명이 사망하고 6200여 명이 피해를 입은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억을 부추겨 국론을 모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반박에 나섰다. 10일 산업통상자원부는 일본산 불화수소의 북한 반출 의혹 제기에 대해 "최근 일본에서 수입한 불화수소가 북한으로 유출된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적발 리스트에 포함된 불화가스 관련 무허가 수출사례는 일부 국내업체가 UN 안보리결의 제재 대상국이 아닌 UAE, 베트남, 말레이시아로 관련 제품을 허가 없이 수출한 것을 우리 정부가 적발한 사례"라고 반박했다.

이와 함께 무허가 수출 적발 및 조치 현황 자료를 제시하며 "우리 정부가 전략물자 무허가 수출을 적발한 실적에 관한 것"이라며 "전략물자관리원의 연례보고서를 통해 전략물자 무허가 수출 적발 및 조치 현황을 매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산업부는 "금번 보도된 자료도 조원진 국회의원실에 2019년 5월 제출된 자료"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는 우리나라 전략물자 수출관리제도가 효과적이고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반증"이라며 "일본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총 적발건수도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일부 적발사례만을 선별해 공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1일자 조선일보 4면 기사.

그러나 정부 측의 반박에 조선일보가 나서 찬물을 끼얹는 모양새다. 11일자 조선일보는 <전략물자 관리도, 해명도 '엉터리 산업부'> 기사에서 "한·일 경제 갈등 국면에서 통상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가 연일 미숙한 대응을 함으로써 일본에 공격의 빌미를 주고 있다"며 "전략물자 불법 수출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실태가 일본 언론에 보도돼 '한국의 전략물자 유출'을 경제 보복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일본의 입장을 강화시켜 줬다"고 썼다.

조선일보는 "후지TV는 '밀수출 안건 중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 암살 당시 사용된 'VX' 연료가 말레이시아로 밀수출되고, 이번 수출 제한 조치에 포함된 불화수소가 아랍에미리트로 나간 것 등이 포함됐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정부가 일본이 수출 규제 품목에 포함시킨 불화수소의 불법 반출을 제대로 막지 못한 것도 문제인 데다, 일본이 불법 유출 문제에 대해 시비를 걸기 시작할 때부터 '일본에서 수입된 전략물자'뿐 아니라 전략물자의 전반적 관리 실태를 명확히 밝혀 의혹 제기를 사전에 차단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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