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양이 아주 오랜만에 브라운관으로 컴백했다. 그의 컴백작이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기대에 박신양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거기다 박신양과 선과 악의 대립각을 세우는 전광렬의 불꽃 카리스마로 드라마 싸인의 구도는 소름끼치도록 강렬하다. 다만 미드 CSI같은 법의학 드라마를 기대했던 사람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드라마 환경상 CSI식 드라마가 성공하기도 어렵다는 것도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여러 여건이 아직 미비한 탓일 것이다.

미드팬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주중 드라마 시간에 편성한다면 분명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지 못할 것이다. 강심장에 출연한 싸인의 감독 장항준은 이 드라마가 애써 추리가 아닌 법의학류라고 강조하려고 했던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싸인을 법의학 드라마라고 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우선 모든 과학이 그렇듯이 법의학은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려고 하지도 않거니와 그럴 수도 없다.

다만 법의학이 내놓은 결과를 두고 악을 찾아내게 할 뿐이다. 그러나 싸인은 그 과학에 침범하려는 악의 힘을 말하고 있다. 앞으로 몇 개의 사건이 더 진행되겠지만 일단 첫 회에 싸인이 보여준 것은 법의학의 원론이나 각론이 아닌 그 바깥에 존재하는 권력, 그것도 아주 악해 보이는 권력을 말하고 있다. 이 드라마 제목에는 그런 여러 가지 상징들이 중첩되어 있다. 싸인이라는 것 자체가 상징이라는 의미이겠고, 싸인을 부드럽게 말하면 사인이 되는데 그것이야말로 법의학이 다루는 사인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싸인은 주검이 법의학자에게 전달하는 신호이고, 사인으로 읽는다면 법의학의 원론적 개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중의법을 사용한 제목에는 큰 호감을 갖게 된다. 결국 죽은 이의 싸인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읽어야 사인을 밝혀낼 수 있다는 함축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싸인이건 사인이건 그것은 죽은 자의 마지막 모르스 부호일 테니 그것을 대하는 법의학자는 정말 사제와 같은 도덕성과 양심이 요구되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싸인은 드라마이고, 당연히 허구라고 말해야 한다. 이 드라마가 한국 현실을 고발할 목적성을 띠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싸인 첫 회에 펼쳐진 숨 가쁜 가상의 한국 현실은 박신양-전광렬의 대리전 양상으로 벌어지고 있는 선과 악의 전쟁이 가상이라고 꼭 우기고 싶을 정도로 사실이라면 정말 무서운 것이다. 드라마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법의학은 죽은 사람이 입이 아닌 자신의 몸을 통해서 마지막 말을 듣는 행위다. 살아있는 모든 입들이 거짓말을 하려고 할 때 그 거짓말을 뒤집을 유일한 증언은 바로 입이 아닌 몸으로 입증하는 사체의 진실에 있다.

그런데 그 죽은 자의 마지막 발언도 막으려는 권력의 음모가 있다. 그것이 싸인이 첫 회에 말하고 있고 앞으로도 전광렬을 통해서 강조될 것이다. 자연 박신양은 그에 대항하고 싸워가는 작은 영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이 현실에 그대로 적용된다면 세상에 억울하게 죽고, 죽어서 남긴 몸의 증언마저도 왜곡된다는 무시무시한 공포를 주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무게의 경고이다. 그것을 시청자들이 어떻게 받아드릴지도 궁금하다.

최고의 아이돌이 죽었다. 그 죽음의 진실을 덮으려는 권력은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검찰도 움직일 수 있는 그런 거대한 존재다. 그 도구로 내세워진 인물이 바로 5년 전 국과수 원장 경쟁에서 밀려난 전광렬이다. 다시 말해 전광렬은 법의학자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목적을 위해 법의학을 오용하는 악의 줄기이다. 악의 뿌리는 물론 권력이다. 결국 박신양을 지지하는 현 원장 송재호가 정년퇴임하게 되고 전광렬이 국과수 원장이 될 것으로 짐작하게 된다. 그로부터 지속적으로 두 사람의 갈등이 전개될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첫 회의 이 거대한 한방의 힘이 끝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없지 않다. 대물이 그랬듯이 초반의 강렬한 고발문법이 점차 퇴색된 것처럼 싸인 역시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가상이건 사실이건 법의학에 대한 경고성 허구를 강조하기 위해 권력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면 앞으로 싸인이 말해갈 이야기 속 악의 존재는 더 커지기 어렵다. 권력 그 이상의 압도적인 악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이 정치권력이건, 경제 권력이건 이 둘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송승헌, 김태희의 마이 프린세스에 미세하게나마 앞지른 첫 출발의 힘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걱정스럽다. 감독이 말한 대로 싸인이 법의학에 더 치중한다면 또 모를까 첫 회의 인상처럼 선과 악의 대립과 갈등으로 지속된다면 곧 지루해질 수도 있는 너무도 큰 한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은 박신양을 믿고 전광렬에게 기대하게 된다. 거기다가 김아중, 엄지원 두 여배우가 보여주는 아주 다른 색깔의 연기도 흥미를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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