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파 방송3사의 예능 대상이 모두 마무리 되었습니다. 대상 결과는 유재석, 강호동의 길었던 양강 체제에 관록의 이경규가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삼자 균형을 이루었죠. 혹시나 박미선이, 혹은 김구라나 김병만이 수상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예측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안정적인 선택이었고, 모두가 납득할 만한 면면들이었습니다. 특정 방송국을 떠나, 이들 세 사람의 이름을 제외한다면 올 한해 대한민국의 예능 프로그램의 경향과 성과는 설명하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아쉬움은 남습니다. 이들 대상 수상자들의 무게감이나 그들이 성취한 결과물들이 불만족스럽기 때문이 아니에요. 유재석의 편안함과 안정감은 초심을 잃지 않는 열정과 함께 해가 갈수록 깊어지고 있고, 강호동의 강렬한 에너지와 전 연령층을 아우르는 사람냄새의 힘은 여전히 멈출 줄을 모릅니다. 그의 수상 소감처럼 자신이 밟는 길이 바로 후배들이 뒤따르게 될 길이 되고 있는 50줄의 선배 이경규의 재기가 주는 의미 역시도 남다르죠. 이들 빼어난 광대들이 만드는 프로그램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웃고 즐길 수 있는 우린 무척이나 행복한 세대인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린 이 세 남자의 천하를 너무나 오랜 시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들이 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프로그램들의 수명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고, 그나마 새로운 대세로 떠오른 남자의 자격 역시도 그 형식에서 리얼 버라이어티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매번 보는 얼굴이 동일하고, 하는 패턴이 유사한 돌림 노래 같은 예능 프로그램. TV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는 예능의 폭주, 범람의 시대는 이렇게 같은 인물, 같은 포맷의 되풀이는 친근함과 익숙함과 함께 식상함과 지겨움을 동시에 주고 있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인물, 차세대 주자의 필요성이 몇 년째 되풀이되어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만년 유망주, 여전히 2인자인 이들이 넘쳐난 이유도 마찬가지이죠. 이제는 좀 뜰 것도 같고, 내년에는 무언가 일을 벌일 것도 같은데 결국은 유재석, 강호동, 이경규를 넘지 못하는 한계를 올해에도 절실히 느끼게 해준 시상식이었어요. 만약 뜨거운 형제들이 마의 시청률 10%를 돌파했다면 박명수에게도 대상의 기회가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세바퀴로 기세가 올랐던 김구라 역시도 마찬가지였겠죠. 이수근에게 1박2일 외에 자신을 대표할 만한 프로그램이 하나만 더 있었다면 KBS 대상의 향배도 무척이나 흥미로웠을 거예요.

그런데 이런 유망주들, 1.5인자들의 성장과 부상이 확연하지만 무언가 아쉬운 올 한해. 정작 2011년이 더욱 기대되는 인물은 전혀 다른 곳에서 빛을 발하며 각종 연예대상 시상식의 주인공으로 떠올랐습니다. 1박2일의 막내이자 강심장의 공동 MC. 이승기가 바로 그 주인공이죠. 누구도 쉽게 하기 힘든, KBS와 SBS 양 방송사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대상의 턱밑까지 단숨에 뛰어 오른 것이죠. 이런 성과는 대상을 수여한 3사람의 1인자를 제외하면 가장 빼어난, 그리고 놀라운 결과입니다. 비중이 큰 본상 2위를 방송사를 달리하며 2관왕한 사람은 최근에도 발견하기 어려워요.

그만큼 자신의 잠재력을 폭발시킨 한해였습니다. 허당의 이미지로 호감을 독차지하긴 했지만 최근 1박2일에서 이승기의 활약은 그야말로 압도적입니다. 강심장을 자신의 무대로 온전히 만드는 넉살과 부드러운 진행 역시 마찬가지죠. 2009년 본격적으로 MC에 뛰어든 신예라고는 믿기지 않은 성장이고, 자랑할 만한 결과입니다. 그렇다고 본업인 가수나 연기자로서의 활약이 떨어졌던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올해 골든디스크 본상 수상자이고, 내일 있을 SBS 연기 대상에서도 수상을 기대하고 있죠. 그야말로 대세. 2010년은 예능유망주로서의 이승기를 재발견하는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이 젊은이의 미래가 기대되는 것은 단순히 이런 성과물들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그의 수상소감에 담긴 성품과 노력의 자세 때문이죠. 예상하지 못했던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늘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는 초심, 자신의 MC 성공 비결이 모두 강호동의 배려와 물러섬 덕분임을 알고 있는 정확한 판단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성공이 스스로의 재능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겸손함과 성실함까지. 이승기는 수상소감에서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인 멋진 사람 됨됨이를 다시 한번 뽐냈습니다. 겸손하고 절제되어 있지만 이제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내민, 자신의 멘토인 강호동을 비롯한 선배들과 함께 이젠 연예대상을 노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도전장 같은 멋진 수상소감이었어요. 이런 사람은 한번 분위기를 타면 걷잡을 수가 없거든요.

기라성 같은 선배들에 의해 독식되고 있는 예능계 판도에 내년에는 이승기가 큰 변수로 자리 잡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게 해준 시상식과 수상소감이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가야할 길은 멉니다. 그의 성공이 상당부분 강호동의 배려와 양보 덕분인 것도 사실이고, 자기 자신의 대표 프로그램이라고 내세우기엔 1인자로서의 존재감이 부족한 것 역시 마찬가지죠. 하지만 분명 이 젊은이에게는 다른 어떤 예능 차기 유망주들보다도 확실히 자신의 시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있습니다. 2011년 예능 프로그램을 즐기는 확실한 포인트 중 하나는 과연 이 청년이 어디까지 더 성장할 수 있느냐를 지켜보는 것이에요. 작년 이승기의 최우수상 2연패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 성장 여부에 따라서 어쩌면 우린 내년도 대상 트로피를 손에 쥐고 있는 이승기를 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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