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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황당해서 뭐라 반박하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면 점잖은 미국 교수들은 이렇게 말한다. 매우 흥미롭군요!(Very interesting)

일본 사람들만 속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직설적이라고 알려진 미국인들도 속내와 표현이 다를 때가 많다. 정말 흥미로워서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상당수는 반박하자니 자신의 모양새만 추잡해질 것 같은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말이, “매우 흥미롭군요”이다.

중국인 박사과정 두 명이 참여했던 지난 학기 한 수업에서는 이 말이 유독 많이 나왔다. 중국인은 목소리가 크고 상당히 직설적이다. 그들은 돌려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그들 체제의 우월성을 확신하고 있는 듯 하다. 국가 중심주의, 효율적인 관치가 그들 체제의 이념이다. 그래서 그들은 조이고, 통제하고, 차단하는 것이 당연하다. 언론도, 인터넷도, 자유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나 자유는 특별 통제 대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친구들은 그렇게 주장할 수 있었다. 미국의 과도한 상업주의와 때로는 무절제해 보이는 언론 자유를 비판하면서 그들은 조이고, 통제하고, 차단하는 중국 정부의 폭압적 언론 정책을 사실상 옹호했다. 국가와 효율성, 그리고 부국강병이 그들 생각의 근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출발점이자 그들 사고의 종착점이었다. 그러나 그 국가에 얼마나 많은 중국 인민들이 포함되어 있는지는 그들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5개국(미국, 영국, 스위스, 한국, 바하마)출신 대학원생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 역시 미국의 과도한 상업주의와 때로는 무절제해 보이는 언론 자유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이 조이고, 통제하고, 차단하는 것이라는 발상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 학생들의 마음 속 종착지점은 내 알 바 없지만, 출발지점은 명확해 보였다. 이들의 출발점은 시민 개개인의 자유였다.

그래서 중국인 학생이 “자유”(Freedom) 대신 “효율”(Efficiency) 이 더 보편적인 가치일 수 있다는 말을 했을 때 이들은(나를 포함한) 썩은 미소로 화답하며 서로를 당혹스러운 눈길로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교수는 베리 인터레스팅을 남발했다. 중국인 대학원생들이 과연 그 분위기를 제대로 감지했을까? 그 때 내 머리속에서는 문득 이런 생각이 지나쳤다.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의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저러 했을까?

▲ KBS 김용진 기자 ⓒ 경향신문
딱 그 수준이다. KBS 기자 김용진을 징계한 KBS 경영진의 사고는 중국인의 그것처럼 구리고 낡았다. 구리고 낡은 생각을 당연하다는 듯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그들의 언행도 중국인들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래서 어처구가 없다. 황당하다. 개인의 행복은 질식되고, 자유는 억압받고, 인권은 무시되는데 겉만 번지르하면 행복한 민주주의가 되느냐 말이다. 중국 인민은 서유럽 시민보다 행복한가? 한국 시민은 미국 사람보다 자유로운가? 한국이 미국 수준에 버금가는 자유와 민주를 이루기 위해서 한국의 언론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KBS 기자 김용진이 KBS 사장 김인규를 포함한 간부들에게 쏟아낸 비판도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김용진은 김인규와 KBS 고위 간부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G20 특집 방송을 수천분동안 하는 것을 공영방송의 저널리즘이라 칭할 수 있는가?”
“G20 특집 방송 덕택에 우리의 경제, 자유, 민주가 함양됐는가, 아니면 대통령만 폼 잡고 만 꼴이 됐는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김용진은 “수십조원의 경제 효과” 운운하며 G20 특집 방송만 수천분을 하는 것은, 결코 공영방송이 가야할 정론의 길이 아니며 오히려 대중 선동 선전술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논리적,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BS 경영진은 김용진 기자에게 정직 4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이유는 KBS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품위유지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누구의 명예? 누구를 위한 품위? KBS의 명예라는 것이 김인규를 비롯한 고위 간부들만의 전유물인가? 그렇다면 김인규를 비롯한 고위간부들은 KBS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무슨 노력을 어떻게 해왔는가?

이명박 언론 특보로 있다가 공영방송 사장이 된 것이 명예로운가, 아니면 정권에 비판적인 추적 60분을 결방시키는 것이 명예로운 행위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전두환 시절 독재 집단을 찬양했던 김인규 자신의 전력이 명예로운가? 김인규가 김용진보다 KBS를 명예롭게 한 적이 있던가? 자신의 보도와 저널리스트의 치열한 삶으로 시민 사회의 평가를 받은 적이 있는가? 누가 저널리스트이고 누가 사이비인가? 누가 무엇을 위반했으며 누가 누구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있는가? 김인규인가 아니면 김용진인가?

▲ 지난 10월 12일 방송된 'KBS G20 특별생방송 D-30, 웰컴 투 코리아'
내가 아는 한 한국을 제외한 전세계 어떠한 주요 언론에서도 G20의 경제 효과가 수 십조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한국 경제 연구소들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받아쓴 곳은 없다. 난 단 한줄의 단신도 찾지 못했다. G20기간, 전세계가 한국을 주시하지도 않았으며, 한국의 성공적인 회담 개최를 극찬한 적도 없다. 심지어 한국 언론에 도배되다시피한 G20 “서울 선언”(Seoul Communiqué)이라는 단어조차도 난 아직 찾지 못했다. 이른바 “서울 선언”은 한국 언론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것이 G20를 바라보는 세계 주요 언론의 일반적인 시선이었다. 거기에는 이명박에 대한 찬양도, 모든 것이 성공적이었다는 겸연쩍은 자화자찬도 없다. 서울의 G20 회담은 많은 면에서 실망스러웠으며 실패작이었다. 성과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우리의 G20였다. 그것이 음식 쓰레기도 당분간 내놓지 말라며 “발악”하듯 치른 G20 정상회담의 진짜 얼굴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때, 중국도 우리처럼 겉만 번지르하게 보이기 위해 똑 같은 짓을 했더랬다. 권위주의에 물든 부패한 개발도상국은 자신의 열등감을 꼭 이렇게 표현해야 속 시원하다. 그런가?

김용진이 아직도 KBS의 탐사보도팀장이었다면 KBS는 아마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이명박 정부의 G20 준비를 의미있게 대비시켰을 것이다. 그런 기사와 프로그램이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KBS는 주로 정부에서 원하는 방향대로, 여당이 바라는 쪽으로, 엄청난 양의 기사와 프로그램을 홍수처럼 쏟아부었다. 진지하게 물어보자. 정말 부끄럽지 않은가?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제발 정신 차리라고 비판하는 언론인을 정직시키는 것이리라. 그래서 정권의 핵심 사업에 비판적인 프로그램은 결방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국익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이명박과 여당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KBS를 망치면서도 KBS를 사랑한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럴까? 나는 이들의 이런 행태적 뿌리를 권위주의와 독재의 역사에 찾는다. 달리 말하면 이들은 “민정당 떨거지들”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구리고 낡은 봉건적 권위주의는 어떠한 수사로도 그 악취를 덮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중국 공산당의 일당 독재와 비슷한 국가 중심주의, 그리고 효율적 관치의 이념이 짙게 배어 있다.

그런면에서 전세계 권위주의의 유산은 이란성 쌍둥이들이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권위주의는 그 성격이 흡사하고 양태가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과 닮았고 30여년 전의 스페인과도 흡사하다. 그리스, 이탈리아도 우리와 비슷했다. 나라의 중심은 대통령이나 총독이고, 정부와 여당이 주인이며 그외 나머지는 “기타”이다. 민주주의의 주인인 시민과, 종인 정부가 자리를 바꿔 앉았다.

시민사회는 협소하고 중앙정부는 비대하다. 그래서 이런 나라들에서는 응당 시민사회에 자리하면서, 시민과 함께 정부의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언론이 제 자리를 못 찾고 정권 근처에서 킁킁거린다. 자치(autonomy)의 개념조차 뉴스룸에 정착되지 않았으니 언론사에 자유(freedom)가 꽃 필리는 만무하다. 당연히 직업 정신(professionalism)은 도태된다. 직업정신을 잃은 기자들은 자신의 회사에서 잘 나간다 싶으면 정치를 하려 들고 정치를 하다가 언론사의 수장이 되기도 하며, 또 다시 정치권으로 영입되기도 한다. 미국 등 서구 유럽 사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양상이다.

후배 언론인들은 선배들의 삶의 궤적에서 일그러진 자신들의 미래를 본다. 강아지가 뼈다귀에 침을 흘리듯, 부지불식간에 권력에 길들여진다. 뉴스룸에는 저널리즘의 전통이 옅어지고, 선배에 대한 존경은 자취를 감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정치꾼들이 저널리스트들을 날려버린다. 자신의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하려는 장인같은 언론인은 희귀해지고, 눈치 빠른 족속들만이 살아 남는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말과 행위를 국익이나 조직, 사회의 안정으로 정당화시킨다. 그리스도, 이탈리아도, 스페인도 그랬다.

비슷하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최근 KBS를 비롯한 한국 언론의 행태를 서구 언론과 비교하기 보다는 30여년전 남부 유럽이나, 현재의 남미 또는 중국 언론과 비교하는 편이 더 편할 듯 하다. 훨씬 더 많은 유사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꼭 곱씹어봐야 할 왜곡된 역사의 그늘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 지난 11월 언론 진흥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KBS의 매체 신뢰도는 44.2%, 영향력은 52.4%로 모두 1위로 나타났다고 한다. 놀랍다. 이렇게 방송하는데도 시청자는 KBS를 신뢰한다는 말인가?

놀랍지도 않다. 스페인의 유명한 독재자 프랑코 정부 아래에서도 스페인의 공영방송은 국민들에게 가장 신뢰 높은 매체였다. 이 곳 언론학자들은 이것을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 때문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허위의식을 키우는 것은 저널리즘일까, 아니면 프로파간다일까? 매우 흥미롭지 않은가?

KBS 스포츠 중계팀에서 근무하다가 2009년 회사를 휴직한 뒤 미국 미주리 대학 저널리즘 스쿨에서 유학 중인 기자. “9시의 거짓말”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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