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가는 올해 극장가의 마지막 화두는 단연 나홍진 감독님의 신작 <황해>입니다. 전작 <추격자>의 성공에 이은 두 번째 작품이고, 순제작비만 100억 원이 투입됐으며, 제작기간이 재차 늘어나면서 온갖 루머까지 나돌아 화제를 집중시키기도 했었죠. 저 또한 <추격자>를 두 번, 세 번 관람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했던 터라 <황해>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리뷰에 썼다시피 뚜껑을 열어본 <황해>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작품이었습니다. 몇몇 틈을 제외하면 2시간 40분에 이르는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을 만큼 완성도가 높은 편이었습니다. 이야기의 완급조절이나 극사실적인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까지, <황해>는 하나의 작품으로서 결코 <추격자>에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몇몇 틈'으로 인해 <황해>가 관객들의 보편적인 입맛에 맞는 영화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는 비단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잔인함이나 침울함만을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5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던 <추격자>도 분명 그런 면에서는 <황해> 못지않았습니다. 다만, <황해>는 <추격자>에 비해 관객이 요구하는 감정이입의 여지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영화든 드라마든 일반적으로 관객에게 "재미있다"라는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결국 감정이입이나 공감대 형성이 필수조건입니다. 그냥 방관자나 관찰자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극 중의 캐릭터와 이야기에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따지고 보면 액션의 표면적인 강도에서는 <황해>가 우위에 있으나 <추격자>만큼 보기 불편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으로 <황해>가 실패작이라 불릴 이유는 없습니다. 제가 "감상주의와의 거리가 좀 더 멀어졌다는 점에서는 <황해>가 <추격자>보다 오히려 높은 완성도를 가졌을지도 모릅니다"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시죠? 다시 말해서 <황해>는 '하드보일드'라고 하는 표현양식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드보일드의 뜻을 한번 읽어보시면 훨씬 이해가 쉬우실 겁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또는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냉담한 태도를 일컫는 말. 1930년을 전후하여 미국 문학에 등장한 새로운 사실주의 수법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하드보일드는 장르(genre)라기보다는 스타일(style)을 말하는 것으로 자연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주제를 냉철하고 무감한 태도로 묘사하는 특징을 가진다. 문학이나 영화 등 예술 텍스트에서 비정하고 건조한 세계의 일면을 미니멀한 스타일로 담아내는 제반 수법들을 지칭한다. 여기서 ‘비정함’의 속뜻은 캐릭터나 사건이 비정한 것이 아니라 작가(감독)의 표현이 건조하고 냉정하다는 의미이다. 곧 세계를 대하는 태도 혹은 스타일을 뜻하는데 이는 작가(감독)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즉 부조리한 세계의 단면을 응시하는 예술가의 냉소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은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견해를 덧붙이지 않은’ 건조한 스타일을 구축했다. - 이상 네이버 백과사전 일부 인용 -

아마 저뿐만 아니라 후반부에 드러나는 불명확한 서사의 전달이 완성도를 갈아먹었다는 점에는 큰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황해>의 결정적인 오류가 이것인데, 나홍진 감독님이 러닝타임의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항간에서 소위 말하는 감독판 편집본이 3시간 30분에 달한다는 루머가 허투루 들리지 않습니다.

<황해>의 불친절함은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던 <인셉션>의 이른바 '열린 결말'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관객들에게 머리를 굴리게 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동일하지만, 이것이 계산된 것이냐 아니면 의도하지 않은 것이냐에 따라 두 영화는 차이가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인셉션>의 엔딩에서 팽이의 움직임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휘청이는 액션까지 - 다분히 의도적으로 - 취하면서 관객을 혼돈으로 밀어넣었죠. 보통의 영화라면 큰 의미를 가지지 않겠지만, <인셉션>은 팽이에 '토템'이라는 명칭과 함께 상당한 역할을 부여했음을 우린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역할의 향방에 따라 결말은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로 해석될 여지를 가졌습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매장면마다 주목하고 새로이 유추하는 것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반면 <황해>에는 이러한 장치가 없습니다. 결말 또한 확실하게 정리가 됐었죠. (구남의 아내가 등장하는 장면은 영화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사족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니까 <인셉션>은 두 갈래로 나뉜 결말로부터 차츰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황해>는 하나의 답을 찾기 위해 내러티브를 끼워 맞춰야 할 판국입니다. 러닝타임에 쫓겨 편집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명백한 오류라는 것이죠. 둘을 비교해보면 전자와 달리 치밀한 계산이 뒤따른 결과로 보이진 않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4장의 초반부에서 한 남자가 시체 안치소에 들러 구남의 아내를 확인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시체가 구남의 아내가 맞는지 아닌지 입니다만, 부수적으로 이 남자가 어디서 튀어나온 누구인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를 보며 관객들은 "저 남자는 대체 누구야?"라는 의문을 가지는 것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가벼운 일례일 뿐이지만 <황해>가 서사의 전달과정에서 일으키고 있는 오류는 대부분 이와 비슷합니다. 즉 <인셉션>은 보다 논리적인 유추를 요구하는 데 반해 <황해>는 극소량의 정보로 추측케 하는 것에 가까운 편입니다.

제가 <황해>의 결점을 지적하고자 굳이 장황하게 <인셉션>을 들먹거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둘 다 관객들의 능동적인 관람태도를 요하지만, 이 능동이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에 따라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인셉션>에 필요한 능동은 숨겨진 혹은 놓쳐버린 과정을 찾는 데 쓰인다면, <황해>는 생략된 그것을 짐작하여 하나의 이야기를 짜맞추기 위해 필요합니다. 이는 결국 주어진 시간 내에 효과적인 서사의 전달에 실패하면서 그 책임을 관객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추격자>를 보며 내러티브에 있어서의 디테일에 탄복했던지라 이 점이 정말 아쉽습니다. 한편으론 감독판 편집본을 꼭 한번 감상하고 싶은 바람도 가져봅니다.

스토리 텔링이 필요한 모든 매체에서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차선적인 필요조건이라면 '무엇을 들려주느냐'는 우선적인 필수조건입니다. 이는 비단 서사의 구조를 가진 영화, 드라마, 소설뿐만 아니라 한 장의 사진과 그림에도 해당하는 비교적 일반적인 사항입니다. <황해>의 경우에는 관객에게 무엇을 들려주느냐에서 다소 심도 있는 주제를 택했습니다. (조선족인 구남이 서울로 오면서 물질과 치정이라는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버려진다는 것이죠. 이것은 도입부에서 내레이션으로 깔리던 '개병 이야기'에 이미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물론 상업영화라 하더라도 이것만으론 흠이 될 수 없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 나이트>에서 시전해 보였듯이 상업영화라고 해서 가벼운 주제만 다루란 법은 없으니까요.

어떻게 보여주느냐에서 하드보일드를 택한 것도 적절한 판단이었습니다. 주제와 결부시켜 서울을 타락하고 퇴폐적인 도시로 그리기에 이만한 표현수단도 없었을 겁니다. 또한 위의 정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황해>가 내포한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세계관과도 잘 부합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것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비약이 간섭을 하면서 현실감이 좀 떨어진 것은 흠입니다. (구남과 면가가 거의 초인적인 인물로 그려졌죠) 아울러 무엇보다도 외적인 표현의 완성도에 비해 내적인 표현, 즉 서사를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한 것은 쉬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저도 <황해>가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특히 오락영화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아마 <황해>는 높은 점수를 얻지 못할 확률이 적지 않습니다. 으레 영화, 노래, 사진 등의 대중을 상대로 하는 예술에서는 기교가 감성보다 앞설 수 없는 법이거든요. <황해>가 제아무리 현란한 테크닉으로 외적인 완성도를 수반한 영화라 할지라도, 인간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취약점인 감성을 자극할 수 없다면 결국 대중의 반응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대중의 관심과 별개로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까지 필요 이상으로 폄하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이것은 결국 고상한 지식인이나 예술인들이 대중들을 우매하다고 손가락질하는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불손한 행위입니다. <황해>에 구멍이 있는 것은 명백하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영화 속에서 그 정도의 단서(?)는 던져주고 있으니 최소한의 의무는 행한 셈입니다. 그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것일 뿐이죠.

반대로 난색을 표하는 분들에게 머리가 나쁘다느니, 무식하다느니 따위의 발언을 일삼는 것도 삼가야 합니다. 영화는, 특히 상업영화는 수능시험도 아니고 논술고사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소위 말하는 예술영화의 난점이 의미를 찾는 해석의 영역에 속한다면 <황해>는 이야기를 찾아 끼워 맞춰야 하는 추리에 가깝습니다. 이건 주의력과 집중력의 차이지 머리가 나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뭐 자랑거리로 삼거나 남을 무시할 건덕지가 되나요? 예전에도 몇 차례 말했지만 지식인들의 의무는 그렇지 못한 자들을 깔보고 조롱하는 게 아닙니다.

조금 애매하게 귀결됐지만, 제가 뭘 강조하려고 한 건지 부디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여태껏 리뷰를 써오면서 별점에 "또는"이라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것만 봐도 <황해>에 대한 제 입장이 어떤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이상으로 <황해>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의 토로를 마치고 몇 가지 의문점을 집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저 혼자서 추측하고 내린 결론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다른 분들께서도 읽어보시고 함께 의견을 교환해보는 것도 좋겠네요. 대신 상호간의 의사는 존중하면서 차분하게 진행하도록 합시다! ^^

1. 결말은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리뷰에 썼던 걸 재정리하겠습니다. 우선 김승현, 즉 구남이 죽이려던 남자는 동시에 두 명의 상대로부터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습니다. 한 명은 김태원이고 다른 한 명은 마지막 장면의 은행에서 근무하던 김정환입니다.

김태원은 면가에 의해 황천길로의 입성을 목전에 뒀을 때 구남이 지켜보는 가운데 혼잣말을 합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딱 한 마디만 들었는데, "그 새끼가 내 여자를 건드렸어. 내 집에서"라고 하더군요. 이걸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김승현은 김태원의 내연녀 - 분당에 살던 - 와 몰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를 눈치챈 김태원이 김승현의 기사에게 그를 죽이라고 청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연녀도 후반부에 이르러 죽입니다. 직접적으로 보여지진 않지만 할 말이 없냐고 물으면서 마지막 기회를 줬었죠. 그럼에도 이실직고를 하지 않자 부하들을 시켜 저승으로 보내라고 명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은행에 근무하던 김정환은 김승현의 부인과 내통하던 사이로 보입니다. 워낙 이 부분에 대해서는 드러난 바가 없지만 그 외에는 달리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런 관계에 있던 김정환은 술을 마시면 늘 웨이터에게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이것은 나중에 이 웨이터가 김태원에게 잡혔을 때 다 불었던 내용입니다) 웨이터는 김정환에게 여자친구의 친구를 얘기하고, 조선족에게 의뢰하면 청부살인을 할 수 있다고 귀띔했습니다. 그 조선족이 면가였고, 면가를 통해 한국에 온 사람이 바로 구남이죠.

2. 김태원은 왜 구남을 죽이려 했나?

1번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김태원은 김승현을 죽이기 위해 그의 기사를 포섭하여 살인을 청부합니다. 기사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김승현을 죽이도록 지시했는데, 그 사람이 구남이라고 김태원이 오해를 한 것이죠. 그래서 구남이 경찰에게 잡히면 자신이 살인을 청부한 게 발각될까 봐 그를 죽이라고 부하들을 보낸 것입니다. 다들 보셨겠지만, 사실은 김승현의 기사가 김승현을 죽이도록 의뢰했던 남자 두 명은 일찌감치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고로 김태원은 구남을 죽일 게 아니라 병원에 혼수상태로 누워있던 기사만 죽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오해 드립이 딱 맞는 해프닝이었죠. 억울(?)한 구남이...

3. 김승현의 부인도 청부살인의 공범인가?

자, 여기서부터 이제 애매모호한 의문이 시작됩니다. 김정환과 김승현의 부인이 내통하던 사이라면, 김정환이 김승현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과연 김승현의 부인이 몰랐을까요?"라고 단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김승현의 부인이 보인 반응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살인현장에서나 나중에 구남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나 김승현의 부인은 겁에 질리기 이전에 슬픔으로 가득해 보였거든요. 반대로 김승현이 습격을 당했을 때 그 시끄러운 와중에도 나오지 않다가, 죽고 나서야 나오는 걸 보면 알고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김정환을 찾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사람도 김승현의 부인이긴 한데, 이것만으로는 뭐라고 단정하기 어렵네요. 캐릭터에 대한 묘사도 미미하고...

4. 구남은 왜 김정환을 죽이지 않았나?

이건 김정환이 아니라 김승현의 부인 때문에 죽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뭐랄까, 김승현이 그렇게 된 데 대한 일종의 죄책감? 그래서 자신이 잘랐던 김승현의 손가락도 돌려줬던 게 아닐까 합니다. 김정환의 낯짝을 확인하러 은행에 갔다가 김승현의 부인과 함께 있는 것을 보며 구남은 둘의 사이를 직감했을 겁니다. 단, 이것도 설명이 너무 부족해요.

5. 구남의 아내는 죽었나?

저로서는 간단한 문제라고 여겼는데 곱씹어볼수록 미궁으로 빠집니다. 남자가 구남의 아내가 맞는지 시체를 확인하러 갔을 때는 얼굴을 보며 알아볼 수가 없다는 말을 했었죠. 그 후에 곧장 구남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맞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이걸 보면서는 분명 구남의 아내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어차피 이 남자에게 시체가 구남의 아내가 맞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뭐 지문대조나 DNA 감별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진이 전부였으니 돈만 챙기면 그만이라며 대충 얼버무렸을 겁니다.

마지막 장면에 기차에서 내리던 구남의 아내를 보면서도 살아있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동안 쭉 그렇게 믿고 있었죠.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 장면이 좀 몽환적으로 그려졌다는 말이죠. 텅빈 기차역에서 혼자 내리는 구남의 아내라니... 이것을 구남이 죽으면서 아내를 오해했던 자신의 과오를 해소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편집점이 좀 모호하긴 하지만, 의도적으로 뒤에 배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 밖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지만 여전히 전 구남의 아내가 살아있다는 쪽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긴 합니다. 구남의 얄구진 운명이 종국에는 김태원의 오해에서 빚어졌던 것임을 감안할 때, 시발점에서 구남이 자신의 아내에 대해 가졌던 감정 또한 그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저는 <황해>의 이야기가 허무주의와 통한다로 보고 있거든요. 이 난장판이 치정에서 비롯된 것도 허무하다면 허무하죠.

덧붙여서 죽고, 살고의 차원이 아니라 구남의 아내는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도 타당성이 좀 결여되어 있습니다. 초반에 구남은 자신의 아내가 돈을 입금했는지를 확인하러 갔습니다. 이때 한 아줌마가 입금이 안 됐다고 말합니다. 중간에서 가로챘다고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왜 연락조차 하지 않았을까요? 딴 남자와 살림을 차렸든 어쨌든 자식과 남편을 생각하는 맘이 있어 돌아갈 마음까지 먹었던 사람이 말입니다. 하긴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하니 이 또한 감히 그 누가 알아차릴 수 있으리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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