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마지막 경기는 패배였다. 11월 22일 창원 야구장에서 벌어진 천하무적야구단의 세 번째 전국대회이자 그들이 천무야로 벌인 마지막 경기였다. 상대는 최종 우승자에 오른 울산 수퍼루키팀이었다. 또 다시 김성수의 홈런도 터졌지만 이미 지쳐 있고 객관적인 전력에서 많이 뒤져 있는 천무야가 그들을 꺾고 결승에 오르기란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라운드에 앉아 울었다.
일 년여 해온 프로그램이 끝나는 시점이니 누군들 콧등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천무야 선수들이 흘린 눈물을 단지 석별의 의미만은 아니었다. 뭐라고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알듯 말듯한 의미가 있고, 그것을 가슴으로는 알겠는데 머리로, 글로 표현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렇게 다 큰 어른들이 마지막 경기를 치렀던 그라운드를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곧 또 하나의 성장 버라이어티의 실패를 의미한다.
유럽처럼 지역사회의 다양한 클럽활동이 없는 한국은 대신 헬스클럽이 고작인 상황에서 사회인 야구 열기가 높아진 것은 대단히 큰 사건으로 봐야 한다. 물론 열기가 높아졌다고 해서 국민들이 마음껏 운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축구, 야구 등은 워낙 넓은 부지가 필요한 운동이기에 장소적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에 천무야는 꿈의 구장이라는 첫 번째 사회인 체육을 위한 큰 꿈을 심어주었다.
그렇지만 천무야를 통해서 악동 이하늘이 아닌 늙은 사자 이하늘을 얻은 것은 크다. 애초에 김창렬, 임창정과 셋이서 시작하게 된 천무야지만 임창정은 중도에 빠져나갔고, 김창렬은 초반에 야구하는 창렬이라는 애칭도 얻었지만 천무야에 대한 열정은 이하늘만큼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것은 천무야 모든 일정의 마지막 2회 골병든 글로브 대상을 이하늘이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다. 야구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히 야구는 부상입기 쉬운 종목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천무야 선수들도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다.
시인 한용운은 사랑하는 이는 떠났지만 자신은 그를 떠나보내지 않았다는 역설로 이별을 이별 아닌 것으로 승화시켰다. 마찬가지로 천무야를 사랑하고, 야구를 사랑하는 시청자들은 폐지된 천무야를 기억 속에서 떠나보내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하늘의 그 작고 꾀죄죄한 미소와 눈물을 아주 오래 기억할 것이다. 일타일생을 외치던 그 철없던 어른들의 좌충우돌 성장기 덕분에 즐겁기도 하고, 울화도 치밀던 그 시간들이 이제는 모두 소중하기만 하다. 다음이, 내년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년에 또 하면 되지”하며 울먹이던 이하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