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위안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의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버린. 이젠 되돌릴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아련한 추억, 그리고 분통함을 고스란히 재현한 것 같던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보면서 그 대담함과 거침없음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지나친 편중이나 투영으로 혹시나 내용이 중단되는 것은 아닐까, 너무나 노골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 개인적인 정치적인 성향, 그리고 이 드라마가 선물했던 안타까운 기시감과는 상관없이 이 드라마의 평점이 어땠느냐고 물어본다면 전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대물은 철저하게 실패한 드라마였어요.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그 주인공을 현실의 누군가로 특정하며 진행해 나갈 수도 있습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엄정한 중립이나, 모두가 만족할 만한 스토리를 향한 요구는 현실을 도외시하고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위선입니다. 저는 어떤 부분, 어떤 캐릭터이든 하나의 이야기는 일정부분의 치우침과 기울어짐을 담을 수밖에 없다고, 또한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매 순간 순간 자신의 인생 속에서 결정과 판단을 내리고 살아가는데, 그 기준이란 결국 정치적이고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런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드라마가, 그것도 정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작품이 중립적인 내용을 품어내라니,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에요.

그러니 대물의 내용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쏠려 있든지, 혹은 드라마 제작 단계부터 우려되었던 것처럼 박근혜 전 대표에게 유리하든지, 또는 현 정부를 홍보하는 목적으로 사용되든지 결국은 일정한 곳에서 그 색깔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방향이 극의 중간부분 이후부터 급격하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빙의로 틀어지기는 했지만 이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은 누구, 어떤 정파에게 친근하게 접근했는지의 여부가 아니에요. 전 이 드라마의 가치와 완성도를 평가하는 기준은 그 전개가 얼마나 타당했는지, 그 마무리는 얼마만큼 시청자들을 납득시켰는지가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비록 대물은 무척이나 마음을 울리는, 혹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해도 높은 점수를 받기는 어려워요.

굳이 초기의 PD와 작가의 하차를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모든 책임과 문제의 시작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겠죠. 드라마가 출발한 이후 마지막까지 달려온 대물의 결말까지 각각의 전개 과정은 구멍투성이의 엉성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무리 서해림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화신으로 등장해서 그분이 겪었던 역정을 거의 판박이처럼 재현했다고 해도, 그녀의 입에서 토해낸 일성들 몇몇이 우리의 가슴을 울렸다고 해도 그 허술함과 엉성함이 면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녀의 말에 담긴 힘은 위험합니다. 서혜림은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그리고 모범적인 대통령은 아니었거든요.

그녀의 대통령 당선 과정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이렇게 허술하게, 우연히, 아무런 노력이나 희생 없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서혜림이 대물 속에서 보여준 행보는 여러 사람의 이상한 헌신과 도움, 기가 막힌 우연과 행운, 그리고 유래 없는 파격과 기행의 집합입니다. 게다가 정작 중요했던 대통령으로서의 재임기간은 지나치게 축소되었고, 몇몇 유별난 사건들만이 부각되었을 뿐이죠. 그녀뿐만이 아닙니다. 등장한 모든 캐릭터들은 매 회가 지날수록 심하게 덜컹거리며 변신과 배반을 반복했고, 마지막에는 갑자기 모두가 급격하게 착해지는 용두사미의 해피엔딩을 강요받았습니다. 이런 이들이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정치인들이라니. 이건 아무리 판타지라고 해도 절망적인 상황이에요.

더 많은 것들을, 훨씬 더 깊이 있는 접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묻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쉬움은 엉망인 대본과 제작 여건 하에서도 눈부신 열연을 보여 준 고현정이나, 그나마 가장 설득력 있고 살아있던 캐릭터를 연기한 차인표, 그리고 순간순간의 번뜩임을 보여준 권상우 같은 배우들의 호연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대물의 초라한, 그리고 씁쓸한 해피엔딩은 그 실패로 더욱 많은 것을 남긴, 한국에서 정치 드라마를 만드는 것의 어려움과 무게를 재확인시켜준 선례로 남았습니다. 아무리 지금의 나라 돌아가는 꼴이 보기 싫고, 떠나간 그분의 잔상이 무척이나 그립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마주하는 것은 아쉽기 짝이 없어요. 노무현에 대한 재평가는, 그리고 현실에 대한 비판과 극복을 위한 희망은 훨씬 더 정교하게, 그리고 제대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대물은 그런 기준에 한없이 못 미치는, 충분히 가능했던 대형사고에 미치지 못한 아쉬운 실패작이었어요.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통해 위안을 받고 마음이 움직이는 장면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절실한 그 무언가, 부족한 그 어떤 것이 있다는 증거겠지만 말이죠.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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