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멸망하고 없는 행성 크립톤에서 지구로 아기가 보내졌다. 스몰빌에 도착한 외계인 아기는 마사와 조나단 부부의 품에서 클라크 켄트가 되어 성장한다. 성장하며 인간들과 다른 자신의 숨겨진 힘을 깨닫게 된 클라크는 지구의 '보이스카우트'가 되어 정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지구를 괴롭히는 악당을 잡은 건 물론 지진, 폭풍, 비행기 사고 등 각종 재난재해에서 인명을 구하는 데 앞장선다. 심지어 나무 위에 올라간 고양이까지 구할 정도로 따스하고 성실한 히어로로 오랫동안 사랑받는다. 바로 슈퍼히어로의 대명사 '슈퍼맨'의 이야기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외계에서 온 정의로운 슈퍼히어로의 탄생이다. ‘인간형 에이리언’이라면 이렇게 인간 친화적이며 마땅히 인간 세상의 도덕을 스스로 내재화함은 물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슈퍼히어로로서 자신을 보호해주고 키워준 지구에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앞장서 지구를 수호하는 데 자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기대하는 바이다.

외계인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들

영화 ‘맨 오브 스틸 (Man of Steel, 2013)’ 스틸이미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게 한 끗 차이다.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은 에이리언, 외계인들은 그동안 어떠했나. 1979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 이래 <인디펜던스 데이>, <화성침공>, <우주전쟁> 등 실체가 드러나지 않거나 기괴하게 생긴 외계인들이 호시탐탐 지구를 노리지 않았는가 말이다. 우리 안의 타자에 대한 배타적인 상상력으로 품어낸 외계인 침공 영화는 손가락으로 꼽기 힘들 정도다. 가장 최근으로는 인간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다른 외계에서 온 '타노스'는 손가락을 튕겨 지구는 물론 우주 절반, 나아가 전체를 재조정하려 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모습을 한 외계인이 당연히 인간친화적이며, 심지어 그의 슈퍼히어로적 힘이 친인간적이며 심지어 초도덕(super-ethics)일 것이라는 우리의 편견은 흡사 예수에 대한 문명적 시각의 변화와도 일맥상통한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예수가 대륙을 가로질러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가자 가장 유러피안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되듯이 그간 인간의 모습, 그중에서도 푸른 눈을 가진 백인 에이리언에 대한 '호의적' 편견 아닌 편견에 대해, 현상금 사냥꾼들이 히어로로 거듭나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제작진이 이이를 제기한다.

영화 <더 보이> 스틸 이미지

<슈퍼맨>의 '아이가 없는 부부에게 찾아온 외계의 소년이 영웅이 된다'라는 전제를 뒤튼 <더 보이>. 시작은 역시나 아이가 없는 부부에게 찾아온 외계인의 아기이다. 그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들에게 아기를 달라며 소망했던 부부. 한밤중 그들 농장에 외계의 물체가 떨어지고 그곳에는 아기가 있었다. 당연히 하늘이 자신들에게 내려준 ‘선물’이라 생각한 부부는 여느 부모처럼 아이를 키웠다.

하지만 12살 생일을 맞이한, 이제 청소년기에 들어선 브랜든(잭슨 A. 던)에게 뜻 모를 환청이 시작되고 평범하고 똑똑한 소년의 삶에 변화가 시작된다. 그저 아기였던 시절 여느 아기들은 몇 번이나 다쳤던 것과 달리 다치지도 베이지도 않고 '기특'하게 자랐던 브랜든. 이제 그는 그런 수준을 넘어 창문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건 물론 잔디 깎는 기계를 저 멀리 던져버리고, 돌아가는 칼 같은 날을 대번에 구부려버리는, 말 그대로 포크도 씹어 먹는 강철 소년이 되어간다. 심지어 눈에서 '레이저 광선'도 쏜다.

사이코패스 외계인 브랜든

영화 <더 보이> 스틸 이미지

슈퍼맨이었으면 축복이자 행운이 되었을 이런 슈퍼히어로의 능력이 하지만, '인간의 도덕'을 내재화하지 못한 브랜든에게는, 아니 브랜든 주변 사람들과 브라이트번 마을에는 재앙이 된다.

인간의 아이가 될 수 없었던 외계인 브랜든. 그는 마치 뇌의 이상으로 도덕심이나 사회적 자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처럼, 자신보다 한참 낮은 능력을 가진 부모와 주변 사람들, 동물들에 대해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일찍이 맹자가 인간의 선의 발원을 우물가로 기어가는 아기를 차마 두고 보지 못하는 '측은지심'에서 찾은 그것처럼, 브랜든은 바로 그런 '선의'가 부재한 외계인이었다. 파란 눈의 흰 피부, 딴 짓을 해도 선생님 물음에는 꿀떡처럼 정답, 그 이상을 대답하는 똑똑한 소년. 하지만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기 위해 기르던 닭들을 무참히 죽이고, 끌리는 소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방식이란 게 스토커와 다르지 않고, 그런 마음이 적의로 받아들여지자 잔인하게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에게 보복을 가하는 탈도덕적인 행태를 보인다.

영화 <더 보이> 스틸 이미지

이런 '비인간적 외계인’의 면모가 드러나는 시기가 '청소년기'라는 점도 절묘하다. 이른바 우리나라에 '중2병'이라는 용어가 있듯이, 브랜든의 탈도덕적이며 비인간적인 행태는 어른들이 보기에는 또래의 반항처럼 해석될 여지를 제공한다. 이제 머리가 좀 커서 어른들 말에 수긍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더구나 말썽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소년의 반항기는 외계 소년의 잔인한 능력과 결부되어 이모부를 잔인한 죽음에 이르게 하고, 뒤늦게 밝혀진 출생의 비밀에 대한 반항은 사이코패스가 되어버린 아들을 책임지려한 인간 부모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으로 마무리된다. 사춘기 외계인의 아노미적 혼돈은 이제야 체득된 그의 무한한 능력과 맞물리며 브랜든 주변은 물론 남부의 평화로운 마을 브라이트번을 재앙에 빠뜨린다.

외계에서 온 파란 눈의 흰 얼굴을 한 아이가 우리가 생각했던 그 '착한 아이'가 아니라면? 이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영화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자신이 전제한 명제에 맞춰 공포의 서사로 직진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 아이', '내 사랑'이라던 부모의 아낌없는 사랑은 되돌릴 길 없는 처참한 대가를 치르고야 만다. 그렇게 <더 보이>는 그간 우리가 의지해왔던 '슈퍼맨'의 서사가 사실은 얼마나 안이한 '편견 아닌 편견'으로부터 비롯되었든가를 묻는다.

<더 보이>의 ‘공포’는 중2병 사이코패스 외계 소년이 벌이는 잔혹한 피의 살육도 살육이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의지해왔던 사랑과 도덕의 선입관을 한 점도 남기지 않고 도려내어 버리는 서사의 군더더기 없음에서 비롯되는 바가 더 클 것이다. 과연 이 재앙의 소년을 지구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 해결은 속편에 기대해 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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