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선가 한번쯤은 들어보셨으리라. 피터 제닝스(Peter Jennings)라고 미국 유명 앵커가 있었다. 2005년 암으로 돌아가신 이 분은 8-90년대 톰 브로커(Tom Brokaw), 댄 래더(Dan Rather)등과 함께 미국 3대 지상파 방송사의 간판 앵커로 이름을 날렸다.

피터 제닝스는 두 가지 점에서 미국의 다른 앵커들과 달랐다. 첫째는 그가 캐나다 태생이라는 점, 둘째는 그의 학력이 고등학교 중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볼 때마다 그의 특별한 이력보다 007 제임스 본드가 떠올랐다. 피터 제닝스는 제임스 본드역할을 한 영화 배우 피어스 브로스넌과 많이 닮았다. 피터 제닝스가 먼저 태어났으니 피어스 브로스넌이 피터 제닝스를 닮은건가?

▲ 피터 제닝스(Peter Jennings)
여하튼 그는 잘 생겼다. 그리고 피어스 브로스넌과 닮았다. 피어스 브로스넌은 007 시리즈를 했다. 그리고 그가 주연을 맡은 007영화 가운데는 북한을 소재로 한 게 있었다. 할리 베리가 본드 걸이었고 ‘문대령’, ‘자오’등 괴물같은 악역이 나오는 007 어너더 데이다.

엉터리 논리같지만 나의 이런 연상 작용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미국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뉴스 쇼, 폭스 뉴스(Fox News)의 오라일리 팩터(The O’Reilly Factor) 에서, 거대한 불독처럼 생긴 진행자 오라일리가 피터 제닝스를 앉혀놓고 이런 질문을1 했다고 했을때 나는 별반 놀랍지 않았다.

오라일리(2002.10.17): 캐나다는 사회주의 국가잖아. 그리고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고. 그래서 내가 너한테 질문하는건데…너는 두 군데에서 다 살아봤잖아. 어느 나라가 더 낫냐?

폭스 뉴스의 정체를 모르는 한국분들로서는 꽤 당황스러울 수 있다. 게다가 캐나다 밴쿠버를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고 알아 온 한국인, 특히 캐나다에 자녀를 둔 기러기 가장들에게는 더욱 당혹스러운 멘트다. 캐나다가 사회주의 국가?...

사실 우리 한국인은 이 정도 멘트에는 결코 당혹스러울 필요가 없어야 한다. 무상급식은 포퓰리즘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서울 시장 오세훈에게는 그렇고 또 오세훈을 서울 시장으로 뽑고 그를 지지하고 있는 많은 서울 시민들에게도 그렇다. 그렇다. 무상급식은 포퓰리즘이다. 그런가? 무상급식이 포퓰리즘이면 우리 아이들에 대한 복지정책도 포퓰리즘인가? 아이들에 대한 복지정책과 무상급식, 포퓰리즘은 그 본질적 내용이 다른 것인가? 아니면 비슷한 내용을 다르게 이름 짓는 것일 뿐인가? 내용을 따지고 들어가면 별다른 차이가 없다. 다만 무상급식이라는 단어의 “무상”과 “포퓰리즘”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고, “복지정책”이란 말에는 비교적 중립적 이미지가 담겨 있다는 차이일 뿐이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 예산으로 아이들에게 점심 밥을 주겠다는 것을 포퓰리즘이라고 한다면 오세훈이 서울 시내 특정 지역 몇 군데를 뽑아서 아파트 단지로 개발한 뒤, 그 개발 차익을 그 특정 지역 주민들이 향유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한 뉴타운 공약도 인기영합주의, 즉 포퓰리즘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당선되면 신혼부부는 집 한채씩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장담한 대통령 이명박의 허황된 거짓말 역시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그런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언론에서는 포퓰리즘이 아니다. 그것은 숭고한 경제 공약이며, 나라를 위한, 국가를 위한, 국민 전체를 위한 결단이자 애국이다. 아리송하다. 과연 그런가?

캐나다가 사회주의인지, 아이들에 대한 복지정책이 포퓰리즘인지 헛갈린다면 오라일리의 주장대로 미국이 자본주의인지, 아니면 한국이 자본주의인지라도 한 번 확인해보자. 경고하건데 당신은 다음 사례에서 한국만이 진정한 자본주의라고 생각해야 한다. 안 그러면 잡아가거나 해고되거나 벌금형에 처해지거나 회사나, 검찰 또는 경찰이 괴롭히거나…여하튼 신상에 매우 좋지않은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최근에 돌아가는 나라 형편으로 봤을때 그렇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한국은 자본주의이고 미국은 아닐 수 있다. 나는 질문만 했음을 기억하라.

▲ 금융 사기를 벌인 버나드 메도프 전 미국 나스닥 위원장 ⓒ 연합뉴스
메도프라고 우리로 치면 미국 코스닥의 이사장까지 했던 미국 월가의 유명인이 2년전 피라미드 금융사기로 체포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며칠전 마크 메도프라는 그의 큰 아들이 개끈으로 목을 매 죽었다. 마흔 여섯살이었다. 마크 메도프는 아버지가 체포되기 전까지는 월가의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였다. 해마다 몇 백억원을 소비해도 좋을만한 재산을 가진 집안의 장남에다 펀드매니저였으니 금전적으로야 뭐 부러울게 있었으랴? 그런데 아버지가 경제 사범으로 체포되면서 그의 인생은 급전직하했다.

이 대목이 우리에게는 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설마 부자 망해도 3대는 간다는데…뭐, 숨겨놓은 돈이 없었겠어? 숨겨놓은 돈이 없더라도 그 정도면 이미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재산을 증여한 후였을 것이고, 펀드매니저를 20년동안 한 사람이 이 돈은 자기 것이라고 우기면 어떻게 재산을 몰수할거야? 자본주의잖아? 사유재산을 어떻게 몰수해? 그냥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텐데 왜 자살했을까? 실의에 빠져 술 먹고 마약한 거 아니야?

이것이 돈 29만원으로 버티면서 국가 원로로 대접받는 내란의 수괴 전두환과, 한 울타리 안에서 단란하게 사는 우리 한국인의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미국은 좀 다르다. 이런 지능적 화이트 칼러 범죄의 경우 미국은 사기 피해자들의 법정 대리인이 천문학적 액수의 소송을 제기하면서 범죄자와 그 자녀, 그 자녀의 자녀들의 재산까지도 동결시킨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재산추적과 몰수를 위한 법적 예비절차가 잘 갖춰져 있다. 소송에 직면한 마크 메도프의 경우 한 건에 500불(60만원정도 된다)이상 소비한 지출 내역이 있으면 이를 상대측 법정 대리인에게 소명하게끔 되어 있었다. 게다가 마크 메도프의 자녀들에게까지도 거대한 규모의 소송이 예정되어 있었다. 마크 메도프는 경제적으로 정말 큰 곤궁에 빠진 자신과 가족의 처지를 절감하게 된 것이다. 마크 메도프가 목 매달아 죽었다고 해서 달라진 것도 없다. 피해자들의 법정대리인은 예정대로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밝혔으며 메도프는 아들의 장례식에라도 참석하길 원했으나 장례식 당일에도 감옥에서 풀려나지 못할 것이 확실시된다.

2003년 나는 미국 자본주의와는 좀 많이 다른 한국 자본주의의 생생한 얼굴과 맞닥뜨릴 기회가 있었다. 몰락한 재벌 가문을 취재할 때였다. 회사는 망했고 자신은 돈이 한 푼도 없었지만, 여전히 성북동 대저택에 살 수 있는 몰락하지 않은 몰락 재벌이었다. 당시 그 전 재벌 회장님에게는 아들과 딸, 두 명의 자녀가 있었다. 누나인 딸은 서울 모 여대를 막 졸업한 24세 사회 초년생, 그러나 재산은 대략 천억원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생인 아들은 서울에 소재한 한 공공기관의 쾌적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공익요원이었다. 대학을 휴학중인 20대 초반의 이 젊은이도 대략 500억원 정도의 재산이 있었다. 그리고 평생 남편 뒷바자리만 한 부인도 대략 천 오백억원. 그래서 합이 3천억원 정도 있었던 이른바 몰락 재벌 가족이다.

좀 길어지지만 취재 과정에서 내 뇌리에 생생히 박힌 두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 넘어가자. 첫번째, 내가 그 전 재벌 그룹 회장의 아들, 20대 초반의 공익요원에게, 공익요원으로 근무하면서 어떻게 사기업의 등기이사로 일할 수 있었는지를 묻고자, 그가 일하는 서울 모 공공기관에 갔을 때의 일이다. 겉보기에도 그 청년을 상당히 어려워하는 관공서의 기관장과 그 청년이 함께 나타났다. 관공서의 기관장에게 근무중인 청년에게 질문을 해도 괜찮겠냐고 묻자, 망설여하는 기관장에게 그 청년이 먼저 나서며 이런 말을 했다.

“놔 두세요. 이 사람들도 이런 일 하는 게 일이잖아요.”

당혹스러웠다. 아니 모멸스러웠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마치 청년 “최철원”을 본 느낌이라고나 할까? 기관장도 아랫사람, 시청자를 대신해 자신에게 질문하는 방송사 기자도 아랫사람인 것처럼 그 청년은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돈의 위용을 맛 본 자의 오만함이었던가?

두번째 기억. 그 전 재벌 그룹 회장이 한 변호사를 통해 나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아무리 그래봐야 나는 감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설혹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6개월 내에 나온다.” 그의 말은 종국적으론 틀림없이 맞는 말이었다. 그의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방송을 했고 그 덕택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가 감방에 들어가긴 했다. 그러나 그는 단 3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3천억원 정도로 추정되는 그 가족의 돈은 당연히 대부분 추징되지 않았으며 나는 그 전 재벌 회장이 병으로 죽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다. 아마도 어디에선가 하늘을 가르는 골프공을 바라보며 “나이스 샷”을 연발하고 있지 않을까싶다.

대구공고 졸업생들이 만수무강하라며 절을 하는 전두환은 내란 수괴이자 남의 돈을 갈취한 도둑놈이지만 잘 먹고 잘 산다. 전두환뿐만 아니라 많은 도둑놈들이 도둑질을 하고도 죄값을 받지 않거나 덜 받는다.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높을 수록 죄값을 덜 받을 확률이 높다. 이는 주장이 아니라 이미 각종 탐사보도를 통해 여러 차례 입증된 통계이며, 한국인의 일반적인 법 상식이다.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높은 자들의 사유재산은 절대적이다. 사회 통념상, 그 사유 재산이 훔친 것이 명백함에도 한국 검찰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를 회수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설 수 있는 제도는 존재하지만 나선 역사는 드물다. 그래서 한국에선 일단 먼저 해 드신 분들이 장땡이다. 훌륭한 한국적 자본주의 제도이다.

이 글, “이상한 나라의 코리안”은 한국 언론에 등장하는 각종 가치적 용어들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하기 위해 기획됐다. 사회주의, 포퓰리즘, 자유, 평등, 좌파, 우파, 극우, 극좌, 진보, 보수, 민주주의, 공익, 공인, 국익, 자본주의 등등이 내가 탐구하고자 하는 가치적 용어들이다. 나는 이 가치적 용어들이 한국 언론에, 그리고 세계 여타 언론에 의해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보여만 준다. 그리고 질문이 많다. 게다가 질문의 주제도 왔다갔다 할 것이다. 혼란스러울 수 있겠다. 그러나 독자가 기존의 가치관에 혼돈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 의도가 성공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내 일차적인 의도는 달성되는 셈이다.

이 글의 또 다른 의도는 독자 스스로가 뉴스를 소비하면서 자신이 소비하는 뉴스에 의문을 갖고,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는 “9시의 거짓말”에서 김인규와 정연주, 워렌 버핏과 여의도 증권가의 김부장을 비교하며, 모든 사안의 핵심적 문제는 결국 “정도와 배합, 그리고 그 도덕적 동기”에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이 우리의 자유, 우리의 민주, 우리의 인권, 우리의 귀중한 그 무엇의 정도와 배합, 그리고 그 도덕적 동기가 어떠해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할 수 있다면 나의 또 다른 의도는 충족되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상한 나라의 코리안”은 “9시의 거짓말”의 속편인 셈이다.

나는 보여줄 뿐 강요하지는 않겠다. 보여만 주겠다고 다짐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 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일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자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 둘째, 설혹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내 글을 끝까지 읽는다고 할 지라도 나는 내가 내 글로 그들의 가치관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 설득하거나 강요해서 되는 일은 아닌 듯 싶다.

법적으로 민주주의가 보장된 사회에서 그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궁극적 권력을 가진 주체는 투표권을 가진 시민들이다. 아무리 한국언론이 엉망이지만 잘 찾아보면 괜찮은 보도도 간혹 있는데, 제대로 보지도, 읽지도, 찾지도, 고민하지도 않고 계속 고향따라 안면따라, 혹하는 한 마디와 비뚤어진 가치관에 따라 찍는다면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다음 번에는 제발 좀 잘 판단해서 결정하시라. 한국 언론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결국 대통령 때문이라고 욕한다면 이명박은 누가 뽑은 것이던가? 여러분이 가진 민주적 권리라고 해봐야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알량한 투표권이 전부다. 주민소환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러분이 미국처럼 검찰 총장을 투표로 뽑지도 못한다. 검사는 룸살롱 아가씨의 성상납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태생적으로 매우 고결한 분들이기에 결코 투표로 검찰 총장을 선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투표로 검찰총장을 뽑는다면 포퓰리즘으로 흐를 요소가 다분하며 포퓰리즘은 빨갱이의 냄새가 나고, 빨갱이는 사회주의와 동의어가 아니던가? 그렇다. 검찰총장을 투표로 뽑는 미국, 사유재산을 몰수하는 미국은 사회주의가 분명하다.

불법이더라도 일단 먼저 챙겨 놓았으면 사유재산이라고 우길수 있고, 국민 세금으로 미국 뉴욕에 한식당은 번드르하게 짓더라도 아이들 한 끼니 밥은 먹여줄 수 없는, 국격 높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그래서 나는 미국 폭스 뉴스의 오라일리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최경영 :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잖아. 그리고 한국은 자본주의 국가고. 그래서 내가 너한테 질문하는건데…이제까지 이야기 잘 들었지. 어느 나라가 더 낫냐?

1Kitty, Alexandra. (2005). Outfoxed: Rupert Murdoch’s War on Journalism. New York: The Disinformation Company Ltd.

KBS 스포츠 중계팀에서 근무하다가 2009년 회사를 휴직한 뒤 미국 미주리 대학 저널리즘 스쿨에서 유학 중인 기자. “9시의 거짓말”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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