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전혁수 기자]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이 선거제 개편안, 공수처법 등을 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하는 데 성공했다. 패스트트랙 지정에 대한 한국당의 저항이 언론에 부각됐지만, 사실 패스트트랙의 성패는 바른미래당의 손에 달려 있었다. 바른미래당은 바른정당계의 패스트트랙 지정 반대로 극심한 내홍을 겪었고, 이 여파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독일에 체류 중인 안철수 전 의원을 복귀시켜 안철수-유승민 공동지도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그러나 안 전 의원 복귀가 바른정당계와 유승민 의원에게 약이 될지는 의문이다.

손학규 대표-김관영 원내대표로 짜여진 바른미래당 지도부는 선거제 개편에 국회 내 선거제 개편에 적극적이다. 손 대표는 지난해 당 대표 선거 출사표에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전면에 내세웠고, 김 원내대표는 이를 기반으로 패스트트랙 협상에 나선 당사자였다.

▲29일 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서 바른미래당 유승민 전 대표(가운데)와 사보임(교체)된 오신환 의원(가운데 아래)이 채이배-임재훈 의원 옆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막상 패스트트랙 지정 논의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자 바른미래당 내 바른정당계 의원들의 반대가 거세졌다. 바른정당계의 반발로 패스트트랙 지정이 난항을 겪자 김관영 원내대표는 사개특위 위원 사보임이라는 강수를 뒀다. 오신환, 권은희 의원이 사개특위에서 제외됐고, 채이배, 임재훈 의원이 빈 자리를 채웠다.

바른정당계의 반발은 더욱 극심해졌다. 당무에 나서지 않았던 유승민 의원이 전면에 나섰다. 유 의원은 지난달 28일 기자회견을 열어 "오신환·권은희 의원의 불법 사보임을 당장 취소하고 원위치로 돌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패스트트랙 지정 이후에도 바른정당계의 반발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안철수계와 연합해 당 지도부의 사퇴와 비대위체제 가동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유승민-안철수 공동체제의 출범을 촉구하는 결의문까지 발표한 상황이다.

이 같은 주장에 손학규 대표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손 대표는 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당을 흔들고 당권을 장악하겠다는 계파 패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며 "안철수-유승민 공동체제를 출범시키라는 주장은 전 당원이 지도부를 선출할 권리를 갖는다는 당헌 제6조와 선거를 통한 지도부 선출을 명기한 23조 등 모든 민주 절차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손학규 대표는 비공개 회의에서 결의문에 서명한 바른정당 출신 현명철 전략홍보위원장과 임호영 법률위원장을 '해당행위'를 근거로 해임했다. 사무처 주요 당직자가 지도부 사퇴를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바른미래당 지도부. (연합뉴스)

바른정당계와 손학규 대표 등 지도부의 갈등은 법정 다툼으로까지 번졌다. 손 대표가 2일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주승용 의원과 문병호 전 의원을 임명하자, 하태경 의원이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한 것이다. 바른미래당 최고위원회는 손 대표와 김관영 원내대표, 하태경, 이준석, 권은희 최고위원, 권은희 정책위의장, 김수민 전국청년위원장 등 7명으로 이뤄지는데, 이들과 협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손 대표 측은 "최고위원과 협의를 안 한 게 아니라 그들이 협의를 거부한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갈등에 가장 상처를 입는 건 바른정당계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특히 계파 수장 격인 유승민 의원이 합리적 보수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것이란 지적도 있다. 안철수-유승민 체제를 세우는 것이 절차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데다, 당론 형성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패스트트랙 지정을 빌미로 공세를 펼치는 게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유승민 의원은 지난해 지방선거 참패 이후 사실상 당 활동을 중단하다시피 해왔다. 이번 선거제 개편, 공수처법 등에 대한 당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유 의원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패스트트랙 지정이 가시화되고 의원총회가 열려 표결이 이뤄지고 나서야 유 의원은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논의 과정에는 적극 참여하지 않다가 문제가 불거지자 그제서야 패스트트랙을 반대하며 전면에 나선 셈이다.

사실 바른미래당은 국회 논의의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당과 한국당이 대치를 하더라도 바른미래당의 의사결정에 따라 법안의 통과 여부가 결정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유 의원 등 바른정당계가 패스트트랙 지정에 반대하는 입장이 명확했다면 선제적으로 당론 형성 과정에 개입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패스트트랙 지정이 임박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패스트트랙 지정을 저지할만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창원성산 보궐선거에서 이재환 후보가 3% 지지율에 그쳤다는 이유로 지도부를 끌어내리려고 한 것도 명분이 없었다는 지적이다. 이준석, 하태경 최고위원 등이 득표율을 근거로 손학규 체제를 흔들었지만, 소선거구제와 정권 심판·보위의 성격이 강한 보궐선거의 특징으로 봤을 때 누가 당 대표를 했더라도 큰 지지율 변화는 없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무리한 지지율 공세와 합리적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의 무조건적인 반대는 내부 갈등에 불만 붙인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열과 내부 송사까지 가는 내홍으로 이어졌다.

▲안철수 전 의원(왼쪽)과 유승민 의원. (연합뉴스)

바른정당계의 주장대로 안철수-유승민 공동지도체제가 형성된다고 해도 문제다. 안철수 전 의원은 바른미래당 지분을 상당수 갖고 있는 말 그대로 '대주주'다. 의석수나 원외위원장 수로 봐도 유 의원이 안 전 의원을 당내에서 동등한 위치에서 권한을 행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단 얘기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소장은 "법안 논의 과정에서는 별 얘기가 없다가 의원총회에서 당의 입장이 정해지니 강하게 반발하고, 앞서는 보궐선거 득표율을 근거로 당 대표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것이 순수한 의도로 보이지는 않는다"며 "끌어내린다 해도 상처만 남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바른미래당 내분이 장기화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엄경영 소장은 "법정다툼도 있고 3~4개월은 지리멸렬한 상태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바른정당계나 호남계나 서로 특별히 움직일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고 내다봤다.

유승민 의원이 향후 안철수 전 의원 측과 공동지도체제를 구상하기보다 손학규 대표 측과 다당제를 추진하는 게 유리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최요한 시사평론가는 "유승민 의원은 합리적 보수라는 캐릭터를 선점하고 있었는데, 이번 패스트트랙 지정 과정에서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다"며 "유 의원이 패스트트랙 지정 과정에서 악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최요한 평론가는 "한국 사회에는 좌우가 아닌 중도, 제3의길을 추구하는 유권자들이 상당수 있다. 유 의원이 유력주자로 발돋움하기 위해선 중도지대를 잡아야 한다"며 "그리고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 세력을 늘리는 방식으로 중도를 잡을 수 있는 전략을 구사한 게 손학규 지도부"라고 말했다. 최 평론가는 "유 의원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안철수 전 의원을 끌어들이면 자칫 갖고 있던 정치적 자산마저도 위태로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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