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진 뒤 많은 것이 달라졌다. 대통령과 국방장관을 필두로 정부 고위 관료는 물론 집권 여당의 유력 정치인들까지 나서 연일 보복과 응전을 공언한다. 최초의 민간인 사망이라는 엄밀한 사실이 과거의 남북 충돌 상황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단호하고도 과격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전쟁’이란 말을 꺼내고 있다. 언론은 발 빠르게 호응했다. 보수신문들은 북한의 이해할 수 없는 만행과 군의 어설프기 짝이 없는 대응에 집중 포화를 쏟아 부었다. 텔레비전은 그야말로 전쟁 상황실을 방불케 했다. 끔찍한 살상력을 자랑(?)하는 첨단 무기들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컴퓨터 그래픽 화면과 함께 연일 안방을 침공했다. 가상의 전쟁이 마치 비디오 게임처럼 텔레비전 화면을 현란하게 장식했다. “눈에는 눈”식의 성서적 응징 논리가 어느새 “눈 하나에 눈 백 개” 식의 현대적 보복 논리로 바뀌었다. 국회가 나서서 국방 예산을 전례 없이 늘렸다. 불과 60년 전에 이 땅에서 일어난 전쟁의 끔찍한 기억은 깡그리 잊힌 듯했다. 2010년 세밑의 얼어붙은 남북 관계는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전후 세대에게조차 전쟁이라는 것을 그 내용과는 관계없이 너무나도 익숙한 가상 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기억의 망실은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과거의 전쟁이 잊히고 연평도 포격 사격이 모든 중대한 사건과 의제를 압도해버린 사이, 저 멀리 울산의 한 대기업 공장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목숨을 건 투쟁(=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정당한 법원 판결로도 움직이지 않는 회사를 압박하기 위해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의 싸움은 그것이 지닌 의미와 중요성에도 연평도 포격 사건에 여지없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전쟁은 외로움과의 투쟁이었다. 우리를 좀 봐 달라는, 우리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말아달라는 간절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역사가 수많은 사건 가운데 몇 가지를 기억할만한 것으로 선별하고 나머지는 무시한다는 오래된 전통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준 일이었다. 1898년 쿠바의 수도 아바나 항구에서 미국 전함 메인호가 침몰한 사건이 여론을 점령했을 때, 기계공들이 발간하는 어느 잡지는 이렇게 적었다. “산업 부문에서 매일 매달, 매년 대학살의 광란이 벌어지고 수천의 귀중한 생명이 해마다 탐욕의 신전에 바쳐지고 있는데도…복수와 배상을 요구하는 외침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진지한 담론이든 언어적 수사든 간에 ‘전쟁’은 “이제 그만!”이라는 목소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깨닫게 되는, 인류가 벌여온 숱한 전쟁의 역사가 공통적으로 주는 교훈이 있다. 그 동기가 순수하게 인도주의적인 ‘좋은 전쟁’은 없다! 어느 전쟁에서도 잔학행위로 잔학행위를 막을 수 없었다. 도리어 보복은 더 큰 보복을, 폭격은 더 큰 폭격을 낳았다. 상대적인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했다 해서, 동기의 순수함을 무기로 지녔다 해서 전쟁의 책임을 피할 수도 없었다. 20세기 전쟁사를 돌이켜 보건대, 수많은 지식인이 전쟁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정부의 선전에 빠져 균형감각과 양심을 잃은 채 전쟁이라는 끔찍한 살상을 지지하는 편으로 돌아서 버렸다. 1차 세계대전을 지지했던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조지 셀즈는 훗날 쓰라리게 회고했다. “나는 뉴욕과 유럽에서 나오는 뉴스들을 사실로 받아들여 완전히 바보가 되어 버렸다. 엄청난 양의 뉴스가 반복되는 통에 내가 그나마 갖고 있던 객관적 사고력은 무참하게 압도당했다.” 전쟁은 그런 것이었다.

전쟁은 국가적, 사회적 일의 우선순위를 뒤바꿔버리기도 했다. 단적으로 전쟁에 필요한 비용의 증가는 많은 경우 복지 예산의 삭감이란 결과로 이어졌다. 이라크 전쟁 당시 미 국방부는 한 기 가격이 백만 달러에 이르는 크루즈미사일을 이라크에 퍼붓는 데만 2억 5천만 달러를 들이는 대신 전국의 노숙자들에게 담요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겨울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복지 예산까지 끌어다 구입한 무기는 밖에서 사람을 죽이고, 안에서는 담요를 지급받지 못한 집 없는 이들이 추위에 얼어 죽는다. 이 명백한 모순의 실체는 그 자신이 2차 세계대전에 공군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저명한 반전운동가이자 이 책의 저자 하워드 진의 다음과 같은 말에 압축되어 있다. “현대 군사 테크놀로지의 무차별적 성격으로 인해 모든 전쟁은 민간인에 대한 전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부도덕하다. 폭군에 맞서, 침략자에 맞서 빼앗긴 국경선을 바로잡으려고 수행되는 것이어서 어떤 전쟁이 ‘정당한’ 것으로 간주될 때조차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처지와는 일정 부분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이 책의 내용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할 까닭은 모든 전쟁에서 관찰되는 ‘보편성’ 때문이다. 전쟁을 지지하는 쪽이 일단 득세하면 절제가 경멸받고 신중함이 소심함으로 간주된다, 전쟁은 내용적으로도 결단코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게 20세기 내내 인류가 치러온 모든 전쟁의 한결같은 교훈이다. 제네바 협정 체결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은 인간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폐기될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전쟁도, 전쟁을 지지하는 것도 결국은 선택의 문제인 바, 하워드 진은 바로 그 선택의 문제를 언론 자유에 빗대어 설명한다. “선택을 자제한다는 것은 언론의 자유라는 쟁점 이외에는 우리에게 행동으로 표명할 만한 실질적인 가치들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단 전쟁뿐일까? 모든 형태의 폭력이 지니는 필연적 속성을 하워드 진은 이렇게 설명한다. “폭력이 권력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때로 폭력은 가장 비효율적이다. 폭력은 그 희생자뿐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항상 가장 나쁜 악이다. 또한 폭력은 부패한다.” 하워드 진이 그 책에서 줄기차게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세대에 걸쳐 전쟁을 만들어낸 이들이 누구인지, 우리의 젊음을 고갈시키고 우리의 자원을 훔쳐간 이들이 누구인지 말하자는 것이다.

현실주의라는 고약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독립적인 정신, 주체적인 시민 의식으로 “이제 그만!”을 요구하는 실천이 필요하다고 하워드 진은 말한다. 온갖 수사로 요란하게 치장된 전쟁 담론에서 허위의 가면을 벗겨내고 “전쟁을 그만두라!”고 당당하게 요구하지 않는 한,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거대한 함성이 되어 울려 퍼지지 않는 한 또 다른 전쟁을 막는 일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우리라고 해서 다를까? 옮긴이의 말대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전쟁을 기획하는 이들, 폭탄을 떨어뜨리는 이들의 시각”이 아니라 “지상에서 방공호를 찾아 허둥거리는 사람들의 시각”이다. 전쟁이 아닌 평화, 호전적 담론이 아닌 평화적 담론을 요구하는 것은 민주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무차별 폭력이 아닌 다른 대안의 가능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한 우화는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홀로 사는 한 남자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본다. 문을 열어보니 강건한 체구에 잔인한 얼굴을 한 폭군이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다. 폭군은 묻는다. “복종할 테냐?”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옆으로 비켜선다. 폭군이 들어와 남자의 집을 차지한다. 남자는 몇 년이고 그의 시중을 든다. 폭군은 독극물이 든 음식 때문에 병에 걸린다. 그는 죽는다. 남자는 시체를 싸고, 문을 열고, 내다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는 단호하게 말한다. “안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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