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창사 12주년을 맞은 전북원음방송의 로컬프로그램 <아침의 향기-전북>은 그동안 진행자가 많이 바뀌었다. 4년전 쯤, 내가 제작을 맡은 후에도 너댓 명 정도 교체되었는데 더 좋은 여건을 찾아 심사숙고해서 자리를 옮긴 것이니 탓할 수도 없다. 진행자가 진지한 얼굴로 면담을 요청해오면 십중팔구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둬야 한다는 통보여서 “시간 좀 내달라”는 말 듣기도 무섭다.

현재 진행을 맡고 있는 오선진씨는 전직 아나운서 출신으로 영화에 매력을 느껴 영화관련 홍보 기획 쪽에서 일을 하다 1년여 전 <아침의 향기 - 전북>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사실 선진씨가 진행을 맡은 지 1년째 되는 날이란 걸 알게 된 것은 애청자 덕분이었다. 오전9시 방송개시멘트와 더불어 ‘맨 처음’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애청자가 ‘선진씨 방송 1년 축하해요’라는 문자를 보내오자마자 이십여명의 애청자가 득달같이 축하메시지를 보내왔다. PD도 기억 못하는 MC의 방송 시작 날짜를 일일이 체크하고 기억하는 애청자라니, 그 충성도가 가히 경이롭다. 11시에 방송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꽃다발에 케익, 그리고 찐빵 등이 책상 위에 풍성하다. 찐빵은 구둣방 아저씨가 보낸 것이고 케익은 휴대전화 끝자리 4×××님이 보낸 것이다. (원래 숫자에 경칭을 붙이는 것은 어법에 맞지 않지만 방송에선 일일이 닉네임을 부를 수 없으므로 간혹 뒷 번호를 애청자의 별칭처럼 부르기도 한다.)

▲ <아침의 향기 - 전북>으로 배달된 각종 선물과 김사은피디(좌) 오선진MC(우) 모습.
잠시 후 중년의 여성이 고운 꽃바구니를 들고 방송국을 찾아왔다. 간혹 서정성 넘치는 고운 글로 사연을 보내주는 '초록예찬‘이란 닉네임의 주인공이다. 꽃집을 한다는 그녀는 손수 만든 꽃바구니로 MC의 방송 1년을 축하한다. ’초록예찬‘님은 라디오를 듣고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면서 MC의 이미지를 연상해서 꽃 하나 하나에 의미를 담았다며 오랜시간 정성을 들여 설명해준다. “선진씨가 가냘프면서도 지적인 이미지라서 갈색이나 카키 계열이 어울릴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종합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살려보았는데요, 요건 골든볼, 하얀색과 보라색의 색카네이션도 고급스럽죠? 이건 ‘리시얀샤스’인데요 김대중 전대통령이 좋아하던 꽃이랍니다. 이건 이름처럼 웃음이 묻어나는 스마일락스, 이건 아즈마소국인데요 재미있게 아줌마소국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하트가 그려진 초록색 나무 바구니에 정성을 가득담은 그녀는 앞으로도 좋은 방송 해달라고 당부도 잊지 않는다. 애청자의 사랑을 듬뿍받는 MC의 모습이 보기좋다. 역시 방송의 꽃은 MC인가 보다.

▲ 애청자 초록예찬님이 직접 만든 꽃바구니(좌측)와 전북 정읍의 애청자가 가져온 유정란과 음료수, 그리고 옻닭이 들어있는 아이스박스(우측).
방송 1주년 맞은 MC에게 쏟아진 선물공세로 며칠간 방송국 식구들이 포식을 하게되었다. 며칠 후, 개인적인 사정으로 하루 월차를 내고 다음날 출근했더니 MC가 5×××님이 방송국에 다녀갔다고 전해준다. 정읍에 사는 5×××님은 지난 여름에 손수 경작한 옥수수를 한 자루 보내주셨던 분이다. 뜨거운 여름 볕에 옥수수 물대기도 힘들었다는데, 택배비도 만만치 않았을 그 농산물의 결실을 받고 감동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번에는 집에서 기른 닭이 낳은 유정란 한 판에다 음료수까지 한 박스를 가져오셨단다. 출출하던 차, 계란 한판을 삶아서 방송국 직원은 물론 다른 사무실 직원들까지 공양을 잘 했는데, 하얀 박스 안에 의외의 선물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뭐냐면요, 옻닭이예요.”

닭을 보내겠다고 해서 조리된 음식인줄 알았는데, 박스를 열어보니 각종 약재가 들어있는 손질된 옻닭이 얌전히 드러누워 있더라는 것이다. 사무실 직원들이 나체로 드러 누워있는 닭을 보고 박장대소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집으로 가져가 부모님 몸보신하시라 했더니 선진씨 어머니도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대략난감’이란다. 요 며칠, MC의 진행 1주년을 축하하는 애청자들의 꽃바구니와 찐빵, 김장김치와 삶은 돼지고기, 계란, 기타등등의 선물에 즐거웠다. 먹긴 먹었는데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PD로서 걱정이 앞선다. 애청자들은 십중팔구 이렇게 말한다. “보답은 무슨 보다압~ 진행자 오래오래 장수혀서 방송이나 잘 하면 된당께~”

▲ 아이스박스 안에 들어있는 커다란 생닭
우리 청취자들 성향으로 보건대 집에서 기른 닭이라며 내년에는 산닭을 들고 등장하실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애청자들은 그런 분들이다. 속정이 무진장 깊은, 그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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