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아직 그의 이름을 기억할라나? 김원중이란 가수가 있다. ‘바위섬’과 ‘직녀에게’ 이후 중앙의 노래판에서 사라진 가수다. 그는 뭘 하며 시간의 강을 건넜을까?

아직 기억한다. 25년 전 그가 처음 노래를 통해 우리 앞에 왔던 때를. 흑백텔레비전 속에서 ‘바위섬’을 부르던 그 사람을 실제로 만나게 된 건 아주 오랜 시간 뒤 어느 거리에서였다. 사람 많은 어느 도심의 길로 5톤 트럭이 들어왔다. 트럭 짐칸의 문이 열리면 노래가 나왔고, 문이 닫히면 무대는 사라졌다. 트럭 짐칸의 무대 위에서 그는 노래를 불렀다. 2002년으로 기억된다. 월드컵의 흥분이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그 때, 그는 전국의 도시들을 돌며 노래에 ‘지역감정 타파’를 담았다. 그 일이 무려 49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 가수 김원중씨가 공연하는 모습. ⓒ광주드림 제공
김원중은 스스로가 부른 노래처럼 산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냥 쉼이 아니라 ‘울림의 쉼’이다. 강력한 비트의 시대에 그는 아직 통기타 하나 들고 포크음악을 한다. 노래는 삶을 담는 것이며 노랫말은 의미의 표현이다. 포크음악은 배경음보다 가사를 강조한다. 그는 삶과 음악이 따로 구분돼 있지 않은 사람이다. 생각이 이곳에 있다면 여기에서 노래를 부른다.

80년 오월을 생각하는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이 땅의 시인들과 동인(나팔꽃)을 결성해 함께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부른다. 모두가 돈과 별반 관련이 없는 공연이다. 물론 표 사서 사람이 들게 하는 공연도 가끔은 한다. 그는 노래를 통해 생계를 잇는 사람이다. 그러나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인지를 항상 마음에 새겨놓고 산다.

버겁고 지친 날도 많았다. 2002년 ‘지역감정 타파’ 전국 순회공연은 하루를 거르지 않고 49일 동안 계속됐다. 쓰러지기 직전인 날도 많았다. 공연이 끝나고 두 달 동안은 솔직히 노래도 부르기 싫었다. 근데 지쳐 엎드린 그를 일으켜 주는 손길도 거리에 있었다.

김원중은 말했다. “지역감정 나라 망치는 괴물인지 다 안다. 거대한 트럭이 도심 거리에 들어가면 어떤 상가 건물은 통째로 트럭에 가려버린다. 주인이 화를 내야 정상인데, 오히려 고마워하는 거다. 좋은 일 한다고 힘내라고 식당 데려가 밥도 사주고, 관객들 앉으라고 의자 몇 백 개를 협찬해 주는 상인도 있었다. 그 힘으로 오늘까지 불렀다.”

김원중이 2004년 광주에서 북한 어린이를 돕자고 2년 동안 ‘달거리’ 공연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24번 공연이 진행됐다. 아는 사람은 안다. 김원중의 달거리 공연의 부제는 ‘빵 만드는 공연’이다. 노래에 북한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 때 달거리 공연을 통해 2년 동안 모은 성금은 ‘북녘어린이 빵공장 사업본부’가 전국적으로 만들어지는 기폭제가 됐다. 그리고 평양 대동강에 ‘북한영양빵공장’을 세웠고, 지금도 하루에 1만 개의 빵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시간은 빛과 같아서 다시 5년이 흘렀다. 김원중이 올해 달거리 공연을 다시 시작했다. 공연에 나서며 그가 밝힌 소회는 이렇다. “2004년부터 24회의 공연을 했다. 힘들었지만 즐거웠고, 음악적으로도 많이 성숙해졌던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5년이 지나고, 북한의 빵공장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지만 남북관계의 악화와 국제원자재가격 상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시 노래를 통해 남과 북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다.”

올해 달거리 공연은 3월부터 11월까지 9번 열렸다. 그렇게 진행된 9번의 공연으로 1052만8900원이 모아졌다. 5000원이면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빵 30개를 만들어줄 수 있고, 그 돈이면 무려 6만3173개의 빵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어렵게 모인 돈은 여전히 남쪽에 통장에서 썩고 있다. 이 나라의 정부가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막아서고 있기 때문이다. 전달되지 못한 빵만큼 북한의 어린들은 굶고 있다.

개인의 진심이 무시될 만큼 남과 북의 관계는 지금 많이 경색돼 있다. 그 단절 너머에서 결국 포탄이 날아왔고, 연평도에 떨어졌다.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지만 진짜 생각을 옮기기 쉽지 않다. 역적으로 몰릴 확률이 높다. 어쨌거나 상황이 여기 닿았으니 뭔가 말은 해야겠다. 단언컨대 먼저 쏘고 나중에 대응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민간인 마을에 대한 폭격, 분명 잘못됐다. 다만 확실한 건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는 것이다. 가장 아픈 사람은 죽은 두 병사의 가족일 것이다. 고 서정우 하사, 광주 사람이다. 광주에 그를 추모하는 분향소가 차려졌고, 조문 행렬이 줄을 잇는다. 다만 의문인 것은 분노가 향하는 지점이다.

▲ 광주광역시에 마련된 고 서정우 하사 분향소 모습. ⓒ광주드림 제공
그는 말년 휴가를 앞두고 있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 그때, 삶과 죽음이 갈렸다. 들어보니 몇 번 휴가가 밀렸던 모양이다. 사고가 난 날은 그가 휴가를 떠나는 날이었다. 전날 개인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남겼다지. ‘배야 꼭 떠라, 휴가 좀 나가자. 내일은 배를 타고 휴가를 가고 싶다.’

간절하게 바라던 그 내일은 왔다. 그는 휴가를 나가기 위해 배를 타러 항구에 나갔다. 그 때 부대로 떨어지는 포탄을 봤다. 그는 자진 복귀를 위해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 포탄에 맞았다. 몸이 산산이 부서졌고, 시신 수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죽음 너머에 어떤 세상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는 배를 타고 아주 떠났다. 그 길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이기에 눈물이 세상을 덮는다. 분노가 하늘을 덮는다.

북한의 연평도 폭격은 같지만 전혀 다른 두 나라 수장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건이다. 서로가 자기 개인 혹은 권력집단의 이익을 위해 추진한 정책들이 결국 엉뚱한 죽음을 낳은 꼴이다.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분노하고 있는 그들은 과연 분노할 자격이 있는가? 혹은 저 죽음에 진정 미안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죄진 자, 무릎을 꿇어라.”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