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시장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시장은 선, 규제는 악’을 모토로 탄생한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사고를 공고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2008년에 발생한 금융위기도 신자유주의의 기세를 흔들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맹목적인 낙관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요. 바로 추상화된 미시경제학 교과서의 다양한 그래프에서 온 것입니다. 경제학의 온갖 모델들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그대로 놓아두면, 자연스레 시장이 균형을 향해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수요와 공급이 알아서 균형을 찾아가려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바로 이러한 믿음에서 ‘시장이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신흥 종교가 탄생했습니다.

▲ 영화 <예스맨 프로젝트>
물론 시장주의자들의 결론에는 단서가 있습니다. 인간이 레고 모형처럼 생각 없이, 일관적인 행동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죠. 그런데 애석하게도 인간은 종잡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존 러스킨은 “영혼이라는 특수한 힘은 경제학자들이 모르는 사이에 모든 방정식 속에 하나의 미지수로 들어와 그들(경제학자)의 계산을 모두 그르쳐버린다”고 말하기도 했죠.

베블런 역시 인간은 경제학 모델의 구조에 지배당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며, 경제학을 논하기 전에 인간의 속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경제학자들은 “애정은 우발적이고 교란적인 요소지만, 진보에 대한 욕망은 한결같은 요소다. 그러므로 인간의 변덕스런 요소를 배제하고 인간을 욕심만 가득 찬 사람으로 생각할 때, 올바른 법칙을 도출할 수 있다”며 인간을 구조의 종속물로 취급합니다.

하지만 아담 스미스도 밀턴 프리드먼도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고, 탐욕의 거대함은 경제학의 기본적인 틀을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요소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이 세상은 경제학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생각보다 더 지저분하고 거대한 인간의 탐욕은 자칫 경제에 매몰돼 인간이 만들어놓은 또 다른 구성물, 사회, 도덕, 문화, 정치 등을 잠식해버릴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예스맨 프로젝트>에는 다우(Dow)라는 기업이 등장합니다. 다국적 화합기업으로 4년 전, 유니온 사를 인수 합병한 거대 기업인데요. 그들이 인수한 유니언이란 기업은 84년 인도의 보팔에서 사상 최악의 산업 재해를 일으킨 기업입니다. 당시 유니언의 살충제 공장이 폭발하면서, 그곳에서 일하던 인도인 5,000여명이 사망했으며, 지금까지도 보팔 시민들은 부작용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우는 부작용의 고통에 시달리는 보팔 시민들을 위해 무엇을 했을까요. 예상한대로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책임을 회피하고는 있다) 물론 다우는 미국 텍사스에서 석면 피해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는 배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도인만 차별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미국인들은 소송하는 방법을 알았고, 인도인들은 이를 몰랐다는 차이점이 있었을 뿐이죠.

그렇다면 다우라는 조직에는 양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철면피들이 다니는, 일반 기업보다 특별히 더 악한 회사일까요.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평범한 기업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프리드먼이 말한 대로 그저 탐욕에 따라 움직였을 뿐입니다. 실제로 다우가 보팔 시민의 치유를 위해 120억불을 지원하겠다는 잘못된 뉴스가 알려지자, 다우의 주가는 폭락합니다. 소식이 알려진 지 단 몇 시간 만에 투자자들은 다우의 주식 20억불어치를 팔아버린 것이죠. 투자자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와야 할 이익금이 쓸데없는 보팔 시민들에게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발 빠르게 행동을 취했습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어찌 기업 경영진들이 보팔 시민들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이윤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세상을 황폐하게 만듭니다.(때문에 인간의 탐욕을 제어할 최소한의 규제가 필요한 것이죠.) 그렇다면 보팔 사건에 대한 시장 만능주의자들에 대한 의견은 어떨까요. <예스맨 프로젝트>에 나온 시장만능주의자의 말입니다. “유니온의 공장은 지역사회의 세수 증가 및 고용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사고는 그 와중에 발생한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장기적으로 모팔의 미래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살충제 부작용으로 현재가 사라진 모팔 시민에게 밝은 미래 운운하는 꼴이란… 정말 역겹습니다.

잠깐 흥분하다보니 <예스맨 프로젝트>의 주인공, 예스맨 소개가 늦어졌습니다. 예스맨은 바로 이와 같은, 시장 탈레반들이 맹신하는 신자유주의의 허점을 전 세계에 폭로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운동가들입니다. 마이크 보난노와 앤디 비츨바음, 2인으로 구성된 이들은 <예스맨 프로젝트>의 감독이기도 합니다.

▲ 영화 <예스맨 프로젝트>
이들은 머리에 띠 두르고, 피켓 들고 항의하는 정형화된 방식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예스맨은 기발하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신자유주의의 어두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데요. 그들이 쓰는 가장 주된 방식은 사람들의 요구에 일단 “예스”하고 보는 겁니다. 이런 식이죠. 예스맨은 다우의 대변인으로 위장해 BBC 뉴스와 생방송 인터뷰를 합니다. 그리고 보팔 시민들의 보상 요구에 화끈하게 ‘예스’로 화답합니다. 즉, 인터뷰를 통해 다우가 모팔 시민을 위해 120억불을 내놓겠다고 말한 것이죠. 그렇습니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다우 주가의 급락을 가져왔던 잘못된 뉴스는 바로 예스맨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뉴올리언스에서도 이들의 활동은 계속됩니다. 기업들에겐 카트리나 피해 복구도 큰 이익을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온갖 기업들이 뉴올리언스 시민들의 눈물 속에서 이윤을 발견해냅니다. 그 결과 건설업자들은 서민들이 살던 멀쩡한 임대주택을 헐어버리고, 카트리나에 새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게 됩니다. 뉴올리언스 시민들은 한 순간에 노숙자가 될 신세에 처한 것이죠. 예스맨은 또 다시 카트리나 피해 1주년 세미나에서 미국의 주택공사 직원으로 가장해, 임대주택 철거계획을 철회하겠다고 밝힙니다. 역시나 뉴올리언스 흑인들의 요구에 ‘예스’로 화답한 것입니다.

기업은 예스맨의 퍼포먼스를 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거짓 희망을 심어줘 그들을 더욱 괴롭게 한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자신들에게 어떠한 희망도 주지 못하는 기업들의 파렴치한 태도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이죠. 동시에 이들의 활동 덕에 카트리나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전국 뉴스를 타게 됩니다.

물론 이들의 행동은 일종의 퍼포먼스입니다. 근본적인 치유책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퍼포먼스가 노리는 점은 무엇일까요. 일단 피해자들을 잠시나마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목적은, 그들의 퍼포먼스를 통해 다시금 세상에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알리고, 기업들의 탐욕적인 실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스’했듯, 기업과 정부는 충분히 서민들의 요구에 ‘예스’로 화답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윤이 나지 않는 한, 그들은 ‘예스’하지 않습니다. 누가 살충제 사고로 고생을 하던, 살 집이 없어지던 이들이 알 바 아닙니다. 예스맨들은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통해 신자유주의 속 기업이 때론 얼마나 뻔뻔해질 수 있는지, 또 이윤 지상주의가 인간의 삶의 만능 치료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전 자본주의 시스템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는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받은 시스템입니다. 때문에 자본주의를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어떻게 등장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선 지나친 탐욕이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의 불만은 쌓였고, 자본주의에 대한 강한 반발로 공산주의가 탄생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규제 없이, 마음껏 인간의 탐욕이 활보할 수 있는 장이 계속 유지되는 한, 우리는 점점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슘페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선도자는 사회주의를 권고하는 지식인이나 선동자가 아니다. 밴더빌트, 카네기, 록펠러의 족속들이다.” 시장탈레반과 탐욕적인 기업들은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지능적 안티세력입니다. 이들의 전략에 빠지지 말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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