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중, 채시라, 유동근, 안내상, 서이숙 등 출연진 면면만 보면 <천추태후>, <정도전> 쯤 되는 대하사극인가 싶다. 그런데 MBC 수목 미니시리즈다. 거기다 사극이 아니라 '금융권' 이야기를 다루는 일본 만화 리메이크작이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건 이런 쟁쟁한 출연진으로 이미 '대박'이라는 이 드라마의 출발이 4.6%였다는 점(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 심지어 타 방송사 경쟁작은 외려 시청률이 상승했다.

그러나 예단은 금물이다. 1,2회 아기자기한 농촌 휴먼 스토리인가 싶었던 드라마는, 2회 말 공주 지점이 폐쇄된 후 주변에서 앞날을 걱정해주던 노대호 공주 지점장이 대한은행 감사로 승진하게 돼 본점으로 들어오며 이야기의 각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버블 경제가 무너지던 일본의 1990년대 일본 금융계는 '금융 빅뱅'을 맞이하게 되었다. 인정이 넘쳐 지역의 대소사까지 챙기던 오오조라 은행의 지조도리 지점장 노자키 슈헤이는 지점 폐쇄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렇게 <감사역 노자키>가 시작되고, <더 뱅커>는 이런 설정을 공주 지점의 노대호 캐릭터로 그대로 들여온다.

지방 지점장에서 하루아침에 감사가 된 노대호

MBC 수목 드라마 <더 뱅커>

올림픽 사격 은메달리스트 출신, 부상으로 올림픽 출전이 불가능해지고 그가 속한 사격단이 해체되며 그는 '별정직’ 사원으로 은행에 특채되었다. 운동선수 출신이라는 우려 속에 뜻밖에도 주산부터 배우기 시작해 강삼도 은행장의 기억에 자신을 새겼던 노대호(김상중 분). 그는 '성실하게 충실히' 대한은행 맨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런 성실한 은행원으로 살아온 시절이 그에게 보상한 건 가족의 붕괴였다.

리먼 사태의 여파로 그의 적극적인 권유로 대한은행과 거래했던 장인은 그의 눈앞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낸 아내는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그 역시 지방으로 좌천되고, 하지만 그는 공주에서도 여전히 충실한 '대한은행 맨'으로 살아간다.

<더 뱅커>는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는 속도전 대신, 1,2회에 걸쳐 진득하게 노대호를 설명한다. 은메달리스트의 사격 실력으로 잡아준 멧돼지, 폐점 위기의 은행도 구하고, 귀농인과 농민들의 연대를 도모하기 위한 협동조합 개설 등 흡사 ‘농촌 계몽 드라마’라도 보는 듯한 고지식한 설정으로 노대호를 설명하는 데 공들인다. 거기에 이미 이혼한 사인지만 암으로 투병하는 아내의 병원비마저 기꺼이 감당하는 책임감까지. 실소를 자아내는 ‘아재 개그’는 덤이다.

시청률 대신 주인공의 캐릭터를 설득하기에 고심한 <더 뱅커>만의 방식은 바로 노대호란 인물이 자본주의의 첨병인 은행, 그중에서도 육관식(안내상 분), 도정자(서이숙 분) 등 첨예하게 대립되는 파벌과 그 파벌을 노련하게 운영하며 세 번째 행장직을 연임하고 있는 강삼도(유동근 분)의 성채와도 같은 대한은행 속에서 '강직한 감사'가 될 기초를 쌓아올리는 시간이었다.

마치 <그것이 알고싶다>의 공주 버전과도 같이 충청도 사투리가 아닐까 싶은 느릿느릿한 말투로 아재 개그를 남발하는 노대호 캐릭터를 지켜보는 건 '인내심'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그였기에 3회 초반 감사가 된 그가 비싼 연회로 이루어진 주주들의 모임에서 값비싼 포도주를 힐난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게 어색함이 없었다. 또한 감사가 된 후에도 공주 지점의 직원의 곤란한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대한은행 옥상에서 돈을 뿌리며 자살을 기도하는 그녀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끝내 애쓰는 노대호의 캐릭터에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벌이는 '공명정대하고 원칙적인 감사'의 여정에 믿음이 가게 되는 것이다.

대한은행, 그 복마전에 뛰어든 감사 노대호

MBC 수목 드라마 <더 뱅커>

그렇다면 노대호에게 전가보도가 된 감사란 무엇일까? 주식회사의 감사는 조직의 업무 상황을 감독하고 조사하는 '감사'를 주요한 직무 권한으로 하는 상설기관으로, 이를 위해 회계 및 영업에 대한 보고를 요구하거나 각종 업무와 재산 상태를 조사할 수 있는 직책이다. 가장 비근한 사례로 회장직을 내려놓은 아시아나 항공의 경우, 그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아시아나 항공의 감사 보고서였다.

하지만 꼭 이렇게 순기능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뱅커>에서 보여지듯, 노대호를 감사로 뽑은 사람은 다름 아닌 행장 강삼도이다. 강삼도는 첫 출근한 노대호에게 공명정대한 감사 업무를 부탁한다. 이에 노대호는 그 대상이 그 누구라도 괜찮겠느냐며 반문하자 멈칫한다. 이렇게 대주주, 혹은 <더 뱅커>에서처럼 최고 경영자의 손에 의해 뽑힌 감사는 자칫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세력이 되기가 십상이다.

바로 이 점이 <더 뱅커>의 관전 포인트가 된다. 노대호, 그가 속했던 대한은행의 공주 지점을 폐점으로 이끈 건 바로 육관식 부행장과 정치인 간의 불법 비자금 커넥션이었다. 부행장은 호시탐탐 강삼도 행장의 자리를 노리며, 또 도정자 전무와 파벌 싸움 중이다. 말로는 공명정대함을 요구했지만 과연 강삼도 행장은 그런 '순수한' 목적만으로 노대호를 발탁했을까? 이렇게 이해가 충돌되는 세력 사이에 본의 아니게 끼어들어간 '원칙적이며 정의로운 휴머니스트' 노대호의 행보가 바로 <더 뱅커>의 주목할 만한 지점이 된다. 즉 우리의 사회에서도 그 위치가 모호한 감사의 '공명정대'한 사회를 향한 싸움의 여정, 그 자체가 <더 뱅커>의 주요한 배경이 된다.

MBC 수목 드라마 <더 뱅커>

노대호만이 아니다. 또 한 사람, 바로 '마녀'라 불리는 한수지(채시라 분)의 존재이다. 고지식한 노대호의 오랜 동료로 여상을 나와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부장, 본부장을 거쳐 이제 강삼도에 의해 임원으로 발탁된 한수지. 부행장의 라인이면서, 동시에 강삼도 행장을 존경하는 그녀가 '성공'과 '멋들어진 대한은행원'으로서의 길에서 겪는 딜레마와 선택 역시 노대호와 다른 지점에서 <더 뱅커>의 볼거리가 된다.

일본 만화 혹은 일본 드라마 특유의 '계몽주의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시작된 <더 뱅커>. 금융이라는, 우리 드라마계에서는 생소한 분야를 소개하기 위해 드라마는 노대호란 인간적인 캐릭터를 중심으로 유동근, 채시라, 안내상 등 중견 배우들의 굵직굵직하고 힘 있는 연기에 기대어 드라마를 추동하고자 한다.

그런데 '연기신'이라 불리는 김상중의 캐릭터 설정조차도 아직은 <그것이 알고싶다>의 또 다른 버전 같다거나 어색하다는 평이 나오고 있는 상황, 거기에 요즘은 드라마의 한 축으로 확고해진 OST마저 생뚱맞게 튀어나오고, 쟁쟁한 배우들의 연기마저 때로는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진행이 과연 애초의 의도대로 이 드라마를 이끌어갈지 우려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구관이 명관’이란 말이 틀리지 않게 3,4회에 들어서며 그 어색했던 나른한 말투하며 어설픈 아재 개그마저 친숙해져가는 가운데, 역시나 위기상황에서 빛나는 김상중의 발군의 연기와 못지않은 채시라 등의 기세가 <더 뱅커>의 다음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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