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게도 제 블로그를 자주 찾아주시는 분들이라면 제가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렛 미 인>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맷 리브스의 이번 할리우드 리메이크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크게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누구랄 것도 없이 <렛 미 인>을 보신 분들이라면 비슷한 입장이셨을 것입니다.

비단 이 영화뿐만 아니라 그간 할리우드가 숱하게 리메이크 혹은 다른 데 뿌리를 두고 영화화했던 작품들은 대개 원작의 오리지널리티를 크게 훼손했던 선례가 많았습니다. 가깝게는 우리나라의 <장화홍련, 시월애>가 있고 멀게는 독일의 <엑스페리먼트>와 일본의 <쉘 위 댄스> 등이 있겠군요. 이와 같은 영화들은 아무래도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결과물이기도 하겠지만, 주로 할리우드는 복잡미묘한 내러티브를 철저히 외면하고 이야기를 단선화 - 선악구도를 명확히 하거나 캐릭터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등 - 시키기를 선호합니다. 다시 말해 할리우드의 리메이크는 가급적 관객의 상상력과 판단력을 거세시키고 오락영화로서 지녀야 할 근본성질에 가장 걸맞게 탈바꿈하는 작업입니다. 그렇다 보니 <렛 미 인>에 대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려가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 년 전에 우연히 극장에서 보게 된, 잉그마르 베르히만 이후론 생소하기 짝이 없는 스웨덴의 영화 <렛 미 인>은, 그 우연에 양손을 모아 감사하고 싶을 만큼의 가히 충격적인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습니다. <렛 미 인>은 이전까지 공포영화의 클리셰이자 두려움의 근원이었던 뱀파이어를 의인화(?)시켜 너무나도 인간적인 캐릭터로 재창조했습니다. 여기서 뱀파이어로 등장한 이엘리는 더 이상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어 목덜미를 물고 피를 빠는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뱀파이어로서의 저주받은 운명으로 인해 누군가를 곁에 두지 못한 채로 평생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야 하는 연약한 아이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죠. 이처럼 이엘리의 고립된 자아가 인간임에도 동일한 처지였던 소년 오스칼과 만나면서 <렛 미 인>은 지독히도 고독하고 공허한 울림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 영화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를 한다? 그것도 <클로버 필드>의 맷 리브스가? 이 소식을 접하고는 첫 마디로 "오~ 맙소사!!!"라며 지축을 뒤흔들 부정적인 감탄사를 토해낸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습니다. 눈으로 뒤덮인 드넓은 설원마저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고자 참으로 적절하게 활용하던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어떻게 망가질지 이미 눈앞에 선했으니까요. 감독의 이름을 떠나서 할리우드는 죽었다 깨어나도 <렛 미 인>의 차가운 감수성을 재현할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들은 이걸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겁니다. 그리고 리메이크에 대한 이러한 예측은 거의 정확하게 맞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맷 리브스는 이 리메이크를 도저히 믿기 힘들 만큼의 이란성 쌍둥이로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리메이크의 완성도를 논하자면 우선 시대적 배경을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오리지널 <렛 미인>과 달리 맷 리브스의 리메이크는 자신이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1983년의 미국을 영화 속에서 초반부터 종종 노출시킵니다. 그러면서 영화에 정치적인 의미까지 가미합니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티비에서 방송하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연설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이 악으로 가득하다는 등의 말을 하는데,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에서도 1983년은 크고 작은 사건이 많았던 해입니다. 소련의 인공위성이 태양광을 미국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한 것으로 오인해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날 뻔한 위기가 있었는가 하면,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상공을 침범했다가 격추당해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레이건은 일명 '스타워즈 계획'이라 불리던 전량방위구상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9.11 테러 이후인 2002년에 부시가 북한,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당시의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지칭했습니다. 이 발언의 배경까지는 제가 잘 모르겠지만, 그럼으로 인해 그는 경제불황에도 불구하고 군비예산을 증액하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 국민들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고자 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악으로 규정한 적을 외부에 둠으로써 거기에서 얻어진 공포를 이용해 내부의 결속력을 굳건히 다질 수 있었죠. 그 밖에도 그라나다를 침공하는 등의 강경노선을 걸으면서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싸움에서 전자의 표면적 승리를 가져오는 데 혁혁한 공 - 이견의 여지는 많지만 - 을 세운 인물이 레이건 대통령입니다.

이처럼 맷 리브스는 오리지널에 비해 이야기의 반경을 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에서 확장시킵니다. 그가 굳이 1983년을 리메이크의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당시의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오웬도 내, 외부적인 고통에 휩싸여 있음을 비유적으로 드러내고 싶음이 아니었나 합니다. 동시에 두 주인공의 관계를 확고하게 이어줄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 소년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극심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기댈 수 있는 가족마저 이미 붕괴 직전에 놓여 있었습니다. (리메이크에서 맷 리브스는 아버지를 음성으로만 등장시키면서 오리지널의 오스칼보다 더욱 고립된 오웬의 현실을 묘사합니다) 레이건의 발언에 따라 미국에게 있어 소련이 악이었다면 오웬에게는 그 자신이 처한 모든 주변상황이 악으로 느껴질 수 있는 셈입니다. 아직은 어리디 어린 소년이 견디기에는 참으로 가혹한 현실이죠.

이를 다르게 생각하면 결국 누구도 자신을 구원해줄 수 없는 상황인데, 이때 애비가 나타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두 사람은 동기는 다르나 같은 이유에서 서로를 갈구하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과 상대방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특히 오웬은 악으로 만연한 가운데 자신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한 애비를 거부할 수 없는 마성의 구원자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애비의 구원이라 함은 외부로부터의 그것이 아니라 내부, 즉 오웬의 고독한 심리를 누일 수 있는 대상이 되어줬다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그랬기에 애비가 뱀파이어임을 알면서도 재차 그에게 손길을 내밀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이 소련이라는 악으로 인해 내부의 결속력을 다진 것처럼 악으로 둘러싸인 오웬 역시 애비를 자신과 내부적으로 동일시하고 합일화하려 애써 노력합니다. 이것을 드러내고자 오리지널에는 없던 두 가지의 장면을 보여주는데, 맷 리브스는 꽤 할리우드스러운 노선을 택하면서도 극의 맥락을 훼손하지 않는 영리한 방식을 택했습니다.

먼저 오웬은 애비의 집에 들어갔다가 그의 아버지로 여겼던 남자의 어린시절 사진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봄으로 인해 오웬은 오리지널의 오스칼과 달리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되리란 것을 직감합니다. 물론 관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리지널에서는 이 부분, 다시 말해 결말이 어떤 뉘앙스를 띄게 되는지 관객의 판단과 상상에 맡기려는 의지를 보입니다. 반면에 리메이크는 할리우드의 유전자를 벗어 던지지 않고 이번에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이밀어 줍니다. 오리지널과 다르게 프롤로그에서 굳이 추후 중복되는 장면 - 늙은 남자가 창밖으로 몸을 내던져 죽는 - 을 보여주고, 이어서 오웬을 비추는 것도 두 사람의 운명이 같을 것임을 맷 리브스가 확정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긴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이전의 할리우드 리메이크작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리지널리티를 해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리지널도 사실상 비극적인 결말임을 부정할 수 없고, 단지 관객이 자의적인 해석으로 비극을 덮도록 자위할 수 있는 여지가 조금 더 남겨져 있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두 영화 모두 비극이지만 후자가 좀 더 명확해지며 비극성을 높였을 뿐입니다.

두 번째로 화장실에서 잠자고 있던 애비를 찾아낸 형사가 도리어 습격을 당하면서 죽음의 위기에 몰렸던 장면이 그렇습니다. 이때 피를 흘리면서 형사는 문의 바깥쪽에 서 있던 오웬에게 손을 내밀고 오웬도 형사쪽으로 손을 내밉니다. 그러나 오웬의 손은 형사의 그것을 잡는 대신에 문고리를 잡고는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럼으로 인해 오웬은 스스로가 악이 되는 것을 용인하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제는 그에게 악이란 더 이상 외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으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아니 구원받기 위해 그것을 외면하기를 택한 것입니다. (어쩌면 1983년의 미국도 내부적인 상황이 이와 흡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오웬에게는 애비가 절박하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죠.

리메이크가 원작과 또 하나 다른 것은 보다 더 성장기의 불안한 심리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성적인 측면에서. 영화 속 오웬의 방 창문에서는 두 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커플이 살고 있는 한 집의 창으로 오웬은 남녀가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는 것을 엿봅니다. (좀 더 길었으면 좋았을 것을... 김이 팍 새더군요 -_-;) 다른 한 집에서는 한 남자가 벤치 프레스를 하거나 아령을 들고 운동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두 집안의 상황은 오웬의 처지와 묘한 대비를 이룹니다. 학교에서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며 '계집애'라는 욕이나 듣는 오웬에게 자신이 엿보는 집의 남자들은 어쩌면 이상향, 즉 강한 남성의 표상이었을지 모릅니다. 이 또래의 소년 - 이라고 할 것도 없이 성인도 마찬가지 - 에게 성적인 능력을 갖췄다는 것은 곧 남성적 우월감을 드러내고자 안달하는 천박한 성향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동시에 근육으로 무장하고 운동하는 남자는 더 말할 나위도 없겠죠. 앙상한 몸매에 마스크를 쓴 오웬은 그저 안쓰럽습니다.

리메이크에서 맷 리브스의 연출력이 거의 흠잡을 데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단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수영장 씬입니다. 그는 이전까지의 몇몇 장면에서 애비를 뱀파이어의 고정적인 이미지로 둔갑시키면서 할리우드의 색채, 즉 오리지널을 단선화시켜 공포영화에 가깝게 만들려는 듯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만약에 이것을 보면서 제가 가졌던 우려대로라면 수영장 씬은 신체절단과 도륙이 노골적으로 보여지다 못해 피로 범벅이 된 애비의 몰골을 비췄어야 합니다. 덤으로 피가 흥건한 입과 살짝 삐져나온 송곳니를 드러낼 수도 있었습니다. 말 안 해도 아시겠지만 이건 시각적인 면이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상상만 해도 끔찍한 결말이죠. 그러나 오리지널에서도 그나마 가장 호러의 색채가 드러났던 수영장 씬에서 맷 리브스도 딱 그만큼만 보여주면서 선을 넘지 않는 절제의 미덕을 선사합니다.

결과적으로 맷 리브스가 리메이크한 <렛 미 인>은 기대치를 훌쩍 상회하는 작품으로 탄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리메이크의 모범으로 삼아도 좋을 만한 완성도를 지녀 적잖이 놀랐습니다. 미국에서의 호평을 접했다고는 하나 솔직히 <클로버 필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저로서는 맷 리브스가 이만한 연출력을 선보였다는 게 가히 충격적입니다. 그는 오리지널의 팬을 의식한 듯 자신의 리메이크는 영화가 아닌 소설을 토대로 했다고 밝혔지만, 직접 보니 그건 조심스레 내뱉은 자기방어의 기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실질적으로 이번 리메이크의 주요골자는 오리지널 <렛 미 인>과 거의 동일합니다. 캐릭터, 이야기, 배경 그리고 결말까지 영화를 쏙 빼닮았습니다. 다만 오리지널이 지녔던 차가운 감수성은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두 영화가 카메라에 담은 공간적 배경만 비교해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개봉 전에 읽었던 한 해외 평론가의 말처럼, 그는 오리지널이 가진 영혼을 소실시키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색채를 입히는 데 고스란히 성공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번 리메이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입니다. 맷 리브스는 분명 오리지널과 원작에서 무엇을 취하고 자신이 더할 것은 또 무엇인지 확고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리메이크의 성공요인이라고 보는데, 그는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리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을 유지하면서 제 색깔을 더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걸 조율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텐데 말이죠. 물론 원작 자체가 워낙 훌륭하지만 그것을 할리우드적으로도 이토록 뛰어나게 풀어냈다는 건 박수를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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