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서혜림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민우당을 차지하고 그토록 그리던 대권의 꿈에 한 발짝 거리에 들어선 강태산도,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 신당을 꾸리며 재기를 노리는 조배호도 모두 그녀의 거취 여부에만 정신이 팔려 회유와 협박에 여념이 없죠. 초보 국회의원에 불과한 일천한 정치 경력, 다른 이들의 도움 덕분에 어부지리로 얻게 된 지방 도지사에 불과한 그녀에게 한국 정치를 움직이는 거목들이 쩔쩔매면서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굳이 최초의 여자 대통령에 오르지 않는다 해도 그녀는 지금의 위치만 봐도 그야말로 대물이에요.

그런데 그녀의 어떤 면이, 무슨 매력이, 특유의 무엇이 이토록 거물들의 구미를 끌어당기기에 개인 재산은 물론이고, 차기 정권까지 내놓을 수 있다며 각종 카드를 내밀며 회유와 협박 공작을 펴게 만드는 것일까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이 드라마가 보여 주었던 그녀의 행보를 아무리 곰곰이 따져보고, 개인의 자질을 찬찬히 살펴보아도 납득이 가질 않아요. 대통령 이순재도, 차인표의 강태산, 박근형의 조배호, 그리고 이젠 검사에서 곰탕왕으로 거듭난 권상우의 하도야도 왜 이리 그녀에게 매혹되고 끌리는지, 그녀에게 연연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인물이 없나요? 드라마 대물에서 서혜림이 보여준 유별난 기개와 능력은 초반 몇 장면, 그것도 그녀가 정치인으로 변신하기 이전의 아주 잠깐의 순간뿐이었습니다. 도리어 국민의 대표라는 자리에 올라선 뒤에 그녀 스스로 무언가를 쟁취하거나 의도하거나 판단해서 이루어낸 성과란 아무것도 없어요. 모두가 그녀를 도와주는 누군가의 공작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될 대로 되라는, 혼자서 고고한 교과서 말을 늘어놓으며 도망치듯이 떠나는 것이 전부였죠. 극중 서혜림의 정치 역정이란 남이 도와줘서 얼떨결에 자리를 획득하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다는 듯 팽개쳐 버리는 것이 반복되었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그 과정 속에서 그녀가 성장했나요? 변했나요? 상처와 경험이 사람을 크게 만든다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내면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에 무척이나 인색합니다. 그냥 다른 배역의 사람들에게도 그러하듯이, 그저 고현정이란 배우의 개인 역량에 모든 것을 의지한 체 많은 것들을 불친절하게 생략하고, 모른 척 넘어가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죠. 서혜림이 가지는 직책의 무게는 점점 더 커지고 그에 따른 기대와 의무도 많아지고 있지만 정작 밋밋하기만 한 그녀는 예전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처음 국가를 원망하며 울분을 토해냈던 그 모습이 훨씬 더 멋있고 매혹적이었어요.

서혜림이 겪은 것들은 무수히 많지만 우린 그녀가 과연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것들을 터득했는지, 어떠한 경로로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만들어 나갔는지, 그래서 자신이 꿈꾸는 나라를 어떻게 구현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나마 그녀의 생각을 살짝 볼 수 있도록 가끔씩 장문의 도덕 설교를 늘어놓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녀에게서 삶에서 채화되어 나온 것이 아닌, 그냥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원론적이고 판에 박힌 이야기이기에 듣는 우리에게 어떤 공감도, 감동도 주지 못해요.

그렇다고 서혜림이 빼어난 행정 능력이나 교섭의 재능, 사람들을 포용하는 인덕이나 어떠한 것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처럼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그녀만의 자질과 능력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랜 시간동안 주구장창 간척지 사업으로 피해 받은 남해도민의 권익 보호에게만 매달려 있지만 다른 이들의 호의와 거래를 통한 해결 말고는 아무런 방법도 찾지 못하는 무능한 그녀에게 국민들이 그녀에게 어떤 미래와 희망을 보고 지지하는지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그녀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여자라는 것, 툭하면 사퇴한다고 기자회견을 하는 것, 그리고 얼굴이 예쁘다는 것 밖에는 없어요.

결국 서혜림은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정해진 결승점을 향해 가기 위해 그 과정을 너무나 무성의하게 스킵해버린, 그래서 철저하게 실패한 캐릭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덩치는 커지고, 그녀를 향한 구애의 손길은 점점 더 강력해지지만 정작 왜 모두가 그녀에게 몸이 달아 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이상한 껍데기뿐인 인기 정치인이 되어 버린 것이죠. 이전 글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이대로라면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도 대통령은 꿈도 꾸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괜히 한 사람 잘못 뽑았다가 이게 무슨 고생인지 싶은 고통은 이미 현실에서도 충분히 겪고 있으니까요. 드라마를 보면서까지 그런 절망과 한숨을 느끼고 싶지는 않아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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