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국회교섭단체대표 연설이 상당한 파장을 불러 일으킨 모양이다. 모처럼 국회에서 고성이 오가는 장면을 보니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도 든다. 한쪽은 무책임한 주장을 하고 다른 한쪽은 과도한 주장으로 맞서는 모양새가 돼버렸는데 그 배후에 정치적 계산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이 계산을 되짚어 보는 것도 정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연설을 핵심만 정리하면 이런 내용이다. 문재인 정권의 소득주도성장은 위헌적 발상으로 경제를 베네수엘라 수준으로 망쳐 놓고 있으며 친북적인 대북정책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만들고 한미동맹을 해체할 것이라는 거다. 또 탈원전 정책으로 미세먼지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별 근거도 없이 금강 영산강 보를 철거했고 노동정책은 강성귀족노조와 좌파단체에 끌려 다니고 있다는 주장과 함께 드루킹 사건과 사법농단 수사로 삼권분립이 무너지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불만도 강하게 표시했다.

이 연설에는 주장의 강도를 떠나 거의 가짜뉴스에 가까운 내용까지 포함돼있어 문제다. 당이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큰 그림을 내보여야 할 교섭단체대표연설이 과장이 섞일 수밖에 없는 선거 유세에서도 쉽게 내놓기 어려운 내용들로 채워졌다. 이에 대한 비판은 정치권과 언론이 구체적 적극적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의 반발이 “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해주십시오”라는 대목에 집중된 듯 보이게 된 것도 문제이다. 이게 “국가원수모독”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인지 의문이다. “대통령은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한 것도 아니고 외신 제목을 인용하면서 한 말이기에 더 그렇다. 이해찬 대표의 진노는 권위주의적 모습으로까지 비춰질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향의 문제라기 보다는 계산의 문제라는 것이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김연철 통일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검증 국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최근 보수언론은 김연철 후보자의 과거 언행이나 글 등을 문제 삼으면서 잘못된 인사라는 공격을 쉼없이 제기하고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연철 한 사람은 반드시 낙마시키겠다는 의지가 엿보일 정도다.

그렇잖아도 2차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고 북한이 무슨 카드를 꺼내들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북정책은 표류 직전이다. 그간 북한의 입장을 비교적 더 수용하는 자세를 보여왔던 원로 인사들도 북한에 무리한 시도를 해선 안 된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날리는 상황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북정책에 있어서 자기 색깔이 매우 분명한 김연철 후보자를 굳이 낙점한 이유도 이런 상황을 고려한 결과일 것이다.

12일 오전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마친 뒤 김진태 의원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만일 인사청문회 국면에서 김연철 후보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낙마하게 되면 최악의 경우가 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북정책에 대한 직접적 통제력을 발휘할 조건이 안 된다는 사실을 미국과 북한이 확인하게 되면 ‘중재자’로서의 노력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기 떄문이다. 이 정권은 자유한국당의 몽니로 개혁 의제를 밀어 붙이지 못하는 상태로 경제 분야에서 까지 속수무책으로 비판을 허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북정책을 통한 여론의 반전 기회까지 완전히 날려 버린다면 집권 후반기의 성과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여당 입장에서는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란 대목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국가원수모독”이란 레토릭이 동원된 맥락도 이의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 “국가원수모독”이란 말은 앞으로 대북정책에 관련한 상황 관리를 대통령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구도로 끌고 갈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집권 여당 대 보수 야당의 구도가 선명해진다면 자유한국당은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정치적 기획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바른미래당 또는 바른미래당 내의 바른정당 출신 인사들과의 이념적 동질성을 강조할 수 있는 국면이 되기 때문이다. 이 구도가 형성된다면 자유한국당은 국회에서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면서 향후에 보수통합 등을 시도해 지지층을 ‘붐업’시키는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입장에선 이런 구도가 달갑지 않다. 정부 여당에 유리한 것은 자유한국당 고립 구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최근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미세먼지 문제와 관련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역할론을 제기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는 그림을 만든 것은 이런 구도를 만들기 위한 의도가 일부 작용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어쨌든 반기문 전 총장은 직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경쟁하려던 인물이다. 정부 여당 입장에선 탕평과 포용의 이미지를 취하면서 미세먼지 문제 대응에 대한 보수야당의 공격을 피해갈 수 있어 좋고, 바른미래당 입장에선 당의 분열이 상수처럼 돼버린 상태에서 구심점이 될만한 인물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릴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윈-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한국당 고립 구도를 만들기 위해 여당이 활용할 수 있는 소재 중 하나는 선거제도 개혁이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원내 4당은 전체 의원 정수를 유지하면서 지역구 의석을 줄이고 비례대표 의석을 확대하는 내용을 기본으로 한 합의안을 검토 중인 상태다. 이들은 선거제도 개혁과 함께 공수처 설치, 검경수사권 조정, 5.18 왜곡처벌 등과 관련한 3개 법안을 신속처리안건 지정하는데 대략 합의한 상태다. 선거제도 개혁을 고리로 해서 지금의 전선을 유지할 수 있다면 검찰개혁 관련 법안까지 덤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문제는 선거제도 개혁과 관련한 합의가 아직도 결론이 난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권역별비례대표제를 완전히 적용할 것인지 일부만 할 것인지가 합의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정당들의 확실한 협력을 조건으로 더불어민주당이 양보해 선거제도 개혁이 실제 되는 데까지 이른다면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평가가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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