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있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뭐가 제일인지 알아? 그건 의리야’라는 것이다. 세상에 사랑에 미쳐서 결혼하는 수가 얼마나 될까? 그 수가 얼마가 되든지 흔히들 그런다. 사랑 뜯어먹고 사는 세월은 그리 길지 않다고. 그렇다면 결혼한 부부가 수십 년을 함께 살아가는 힘의 원천은 바로 그 의리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의리는 믿음도 되고, 가끔씩은 느닷없는 열정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변화무쌍한 존재인 듯싶다.

요즘 드라마에서 불륜은 아주 흔하다. 막장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드라마라서가 아니라도 불륜의 코드는 드라마가 만들어내는 픽션이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딱히 욕만 할 일은 아니다. 역전의 여왕에서 백여진이 봉준수에게 기습 키스한 것은 어쩌면 불륜 측에도 끼지 못할 가벼운(?) 도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보다도 부부 간의 의리를 더럽힌 한상무와 백여진의 봉준수 사주는 그야말로 패륜이라고 해야 옳다.

결과야 어떻게 됐건 간에 그런 일이 실제 부부 사이에 벌어진다면 아마도 불륜 이상의 배신감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 나라면 그 상황에서 상대를 더 이상 가족으로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패륜적인 설정은 황태희에게 여러모로 나쁜 감정을 버리지 못한다 해도, 또 황태희에게서 봉준수를 되찾고 싶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현실적이지 않다고는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픽션이라는 가정 하에서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그쯤에서 이 드라마에 대한 매력이 떨어지려는 때에 한순간 시선을 붙잡고 건조한 가슴을 순식간에 적셔버린 장면이 나왔다. 피티 문건 유출을 서로 의심하는 와중에 이미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목부장을 찾아나선 황태희는 우연찮게 그의 병을 알게 된다. 이미 작가가 목부장의 에피소드를 꽤나 무게 있게 다뤄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알고도 당한다고 하필 그때 걸려온 딸과의 통화는 보는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부장이면 사실 대기업에서는 버텨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구조조정이라는 말 이전에 처리됐어도 벌써 퇴직했어야 할 형편이다. 남자가 사회생활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뒤로 처질 때 가장 불행감을 갖게 된다. 그뿐인가. 두 아이와 아내는 외국 유학 생활로 가뜩이나 가족의 위로가 필요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썰렁한 빈집일 따름이다. 어찌 보면 적지 않은 우리 주변 가장의 모습이다.

그런 목부장에게 구조조정의 칼날이 목에 닥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직장 뿐만 아니라 인생까지도 해고되게 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니. 암으로 앞으로 6개월밖에는 더 살지 못하지만 그 남은 세월마저도 자신의 죽음 뒤에 남은 가족을 위해서 병을 숨기고 특별기획팀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보통 암판정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세 가지 과정이 있다고 한다. 부정, 분노 그리고 체념. 목부장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에 딸린 두 딸과 아내는 코 앞으로 다가 서 희롱하고 있는 죽음 앞에서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누군들 자신의 죽음을 두고 특히 가족에게 위안 받고 싶지 않겠는가. 아무 위안도, 아무 격려도 받지 못한 채 단지 회사에 해고되기 전에 죽기만을 바라는 이 중년사내의 바람은 역전이라는 말이 얼마나 사치스럽게 들리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딸과 통화하면서 북받치는 설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참아내는 김창완의 연기도 가슴 절절이 전해졌다. 그 순간 숨이 턱하고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처지는 결코 쉬운 케이스는 아니다. 그러나 그 상황은 그 어떤 역전의 승부보다도 더 처절하고 필사적인 마지막 사투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봉황부부에 얽힌 패륜적 설정보다 더 가슴 아픈 목부장이 울고 그리고 나도 울었다. 목부장의 오열이 마침 다가서는 을씨년스러운 겨울 소식 같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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