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출신의 걸출한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일찍이 하나의 국가나 체제가 신념의 자유를 폭력으로 억압할 경우, 양심의 유린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세 가지 길만 남는다고 했다. 첫째, 국가의 테러에 공공연히 맞서서 순교자가 되는 길이다. 둘째, 내면의 자유와 자신의 생명을 모두 보호하는 방법으로, 겉으로는 굴복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감추는 것이다. 셋째, 이민을 떠나는 것이다. 이 책은 이 세 가지 가운데 마지막 것을 선택했던 한 인문주의자가 종국에는 첫 번째 유형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종교개혁 시기라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탐색하고 있다. 16세기를 대표하는 종교개혁가로 널리 알려진 장 칼뱅은 불과 스물다섯 나이에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써 서구 역사상 처음으로 개신교 교리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스위스 제네바에 정착한지 석 달 만에 <교리문답서>를 시의회에 제출한다. 위대한 편집증에 사로잡힌 칼뱅은 ‘성서정치’라 불린 새로운 형식의 교조적인 독재를 창조해냈다. 광신적인 주지주의자로서 완전한 말씀과 정신으로만 일생을 살았고, 악마 같은 근면성과 히스테리성 권력욕을 지닌 신권정치가로서 폭군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유형이라는 금욕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칼뱅의 청교도 도덕은 사람들에게서 쾌락을 거세했다. 즉 “신적인 것을 세계보다 가능한 한 높이기 위해 칼뱅은 지상의 것을 무한히 낮추었다. 하나님의 이념에 가장 완전한 품위를 부여하기 위해 그는 인간의 이념에서 권리와 품위를 빼앗아버렸다.” 자유가 사라졌다. 완벽에 가까운 도덕적 청결을 강요하기 위해 칼뱅은 자신의 도덕적 테러가 제대로 관철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종교국’이란 기구까지 만들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받은 종교국의 도덕경찰관은 시도 때도 없이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검사하고 적발했다. 이 끔찍한 인간사냥 앞에서 사람들은 먹고 일하고 자는 일상에서부터 개인의 신앙생활까지 셀 수도 없이 많은 하찮은 일에서도 ‘금지, 금지, 또 금지’의 규율에 복종해야 했다. 테러 상태가 고착화되자 자발적인 밀고라는 역겨운 식물이 번성했고, 밀고의 물결이 흘러넘쳐 종교 재판이라는 물레방아가 끊임없이 돌아갔다. 오로지 ‘의무, 의무, 또 의무’가 사람들의 자유와 삶의 기쁨을 앗아가 버렸다. 칼뱅의 하나님에게 용서란 없었고, 칼뱅의 기독교는 용서를 허락하지 않았다.

“체계적으로 구성되고, 독재적으로 자행되는 국가 테러는 개인의 의지를 마비시킨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를 해체하고 뒤집어엎는다. 소모성 질환처럼 그런 테러의 힘은 영혼 속으로 스며들고-이것이 궁극적인 비밀이다-일반적인 비겁함을 자신의 조수로 삼는다. 모든 개인은 스스로 의심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폭군의 명령과 금지를 미리 앞서서 행하기까지 한다.” 보신주의와 패배주의가 횡행하기 시작했다. 그저 눈에 띄지만 말자! 의상이나 너무 서두른 말이나 흥겨운 얼굴 따위로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자! 그저 의심만 받지 말고, 그저 사람들이 자신을 잊게 만들자! 관계와 소통에 의해 지탱되던 공동체는 철저하게 파괴됐다. 그런데 그 때, 이 전능한 독재자의 앞에 위험천만한 적이 나타났다.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 젊고 열정적인 이 인문주의자는 그 시대를 휩쓸던 개신교 신앙 열풍 속에서 자신이 본보기로 삼을 대상으로 당대 최고의 종교개혁가로 이름을 날린 칼뱅을 찾아간다. 하지만, 성서를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하겠다는 카스텔리오의 야심이 칼뱅의 권위를 자극했고, 최초의 힘겨루기에서 패배한 카스텔리오는 제네바에서 쫓겨나 이곳저곳을 떠돌며 지독한 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다.

카스텔리오가 제네바를 떠난 뒤, ‘기묘한 사람’으로 불린 에스파냐 청년이 나타나 유아세례와 삼위일체가 잘못된 교리라며 설파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미겔 세르베투스. 이십대의 이 독실한 기독교도는 자신만의 기독교 교리서인 <기독교 재건>을 써 칼뱅의 성서 <기독교 강요>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다른 교리 해석을 용인할 수 없었던 칼뱅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세르베투스를 죽음에 이르게 할 음모를 꾸몄다. 곳곳에 덫을 놓아 가톨릭 종교재판 당국에 붙잡히게 만든 것이었다. 요행히 한 번은 포박을 풀고 달아날 수 있었지만, 결코 두 번의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다시 체포된 세르베투스는 처절한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하며 없는 자백을 끊임없이 강요받았다. 하지만,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강고한 신념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를 판결하고 고문하고 불태워보아라! 내 몸을 갈가리 찢어보아라!” 끝까지 자신의 신앙,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그 어떤 비겁한 고백도 거부했던 젊은 세르베투스는 결국 화형대의 불기둥에 묶여 산 채로 태워졌다. 세르베투스의 처형은 “개신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종교적 살인’이었고, 따라서 개신교 원래의 이념을 분명하게 부정한 사건”이었다. 칼뱅의 광신(狂信)은 용인할 수 없는 지경을 이미 넘어설 대로 넘어서고 있었다.

“인문주의적인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체념했고, 그럼으로써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행동하기 쉽게 만들어주었다. 인문주의자들, 성직자들, 학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싸움이 역겨워서, 또 어떤 사람들은 세르베투스의 처형이 칭찬할 만한 것이라고 찬양하지 않았다가는 자기가 이단으로 몰릴까봐 두려워서, 탁월한 견해를 가졌지만 싸우려 들지 않는 체르힌테스(칼뱅과의 논쟁이 두려워 침묵을 택한 인물)처럼 행동했다.” 바로 그 때 한 인문주의자가 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나와 공개적으로 칼뱅을 비판하는 책을 써 세상에 알렸다.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 “이단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면, 나는 우리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우리가 이단자가 부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해, 혹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생각에 대해 너무나도 뚜렷한 확신을 가진 나머지 오만하게 다른 사람을 멸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오만에서 잔인함과 박해가 나온다. 오늘날에는 거의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견해가 있건만, 다른 사람이 자신과 견해가 같지 않다면 조금도 참으려 하지 않는다.”

병적인 야만성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관용’이었다. 칼뱅은 이번에도 검열과 흑색선전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유일한 적대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카스텔리오는 공개적인 고발장 <칼뱅의 글에 반대함>에서 칼뱅이 자신의 교리서 <기독교 강요>에 쓴 최초의 신념을 저버린 변절을 날카롭게 통박하고 미겔 세르베투스의 살해가 부당하다는 것을 적확하게 논증해냈다. 이 순수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문주의자는 시종일관 정치하고도 빈틈없는 글로 칼뱅의 말과 행동이 지닌 치명적 모순을 폭로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관용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 “당신 사람들에게서 폭력과 박해의 권리를 빼앗으시오! 사도 바오로가 요구한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쓸 권리를 주시오. 그러면 당신은 자유가 강제에서 한번 풀려나면 지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오!” 하지만, 화해와 관용을 모르는 광신자는 혼신을 다해 이 온건한 인문주의자를 갖은 모략과 술수로 탄압했고, 오랜 재판에 따른 과로에 시달리던 카스텔리오는 48세 나이에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자기 자신의 의견을 억압하려는 편협한 광신주의에 대항하여 이 세상의 온갖 적대심을 해결할 수 있는 관용의 이념을 제시한, 진실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함으로써 어떠한 테러도 자유로운 영혼에 대해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인물, 카스텔리오.

16세기의 인문주의자를 21세기 오늘날의 지식인으로 치환해도 아무런 모순이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신의 변절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실을 덮기에 급급하고, 체제에 기생하며 달콤한 떡고물을 받아 챙기는 자,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애써 침묵하고, 제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 서둘러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자, 비겁하고 나약한 지식인들의 모습은 어쩌면 그렇게 카스텔리오 시대의 인문주의자, 신학자들과 똑같은가. 16세기의 칼뱅을 오늘날의 위정자로 이름만 바꾸면 그 ‘구조’란 것이 놀랍도록 흡사한 까닭은 또 무엇인가. 말을 이유로, 글을 이유로 특정인을 탄압하는 지배 권력의 속성 때문일 게다. 조금이라도 입바른 소리를 내면 버릇처럼 징계니 사법처리니 운운하며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물리적으로 박탈하려는 전제적 테러행위를 21세기를 사는 지금 우리는 일상적으로 만나고 있다. 무려 500년에 가까운 시대적 간극에도 권력을 손에 쥔 자의 지배욕과 그 일방통행식 욕망이 빚어내는 체제의 폭력적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츠바이크가 카스텔리오라는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를 통해 나치즘과 파시즘이 횡행하던 자기 시대를 준엄하게 비판한 것처럼 21세기를 사는 우리 역시 카스텔리오의 존재를 역사의 수면 위로 불러낸 츠바이크를 우리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 읽어낼 수 있으리라. 츠바이크의 말대로 “언제든 모든 칼뱅에 맞서 어떤 카스텔리오가 다시 나타나서 폭력의 모든 폭행에 맞서 사상의 독자성을 옹호하게 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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