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권력을 가진 남자와 그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남자와의 대결이라는 흥미로운 구도는 <초능력자>의 핵심입니다. 눈 빛 하나로 모든 인간을 조정하는 초능력자와 너무 순수해 조정당하지 않는 규남은 우리시대의 권력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권력 사용의 좋은 예와 나쁜 예

1. 초인과 초인의 대결

어린 아이가 빗속에서 의족을 한 채 눈까지 가리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뭔가 겁에 잔뜩 질린 어머니는 아이의 눈에 신경을 씁니다. 식사를 먹여주면서도 결코 눈에 두른 붕대를 풀지 말라 합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대신 해줄 테니 절대 눈의 붕대를 풀지 말라합니다.

"아프지도 않은데 왜"라는 아이의 반문과 뒤이어 들이닥친 아버지는 모두를 긴장하게 합니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도망친 어머니와 뭔가 이상한 아이에 화가 잔뜩 난 아버지는 밥을 허겁지겁 먹던 밥상을 뒤엎고 어머니를 다시 모질게 패기 시작합니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폭력에 아이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맙니다. 바로 아이의 눈을 가린 붕대를 풀어버린 것이지요. 그가 세상을 바라보자 알 수 없는 상황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는 조정이라도 당하듯 뒷걸음질을 치며 집을 나와 거리에 나서고 스스로 목을 뒤틀어 죽음을 택합니다.

아니 죽음을 택한 게 아니라 사람을 조정하는 능력을 가진 어린 소년은 엄마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살해했습니다. 그런 아이와 함께 죽음을 택하려던 어머니는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아이에 의해 절망을 맛보게 됩니다. 차마 자신을 감싸던 어머니를 죽이지 못한 아이와 남겨진 어머니. 그렇게 세월은 흘러 아이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폐차장에서 일하는 순박한 청년 규남은 터키에서 온 알과 가나 출신인 버바와 무척이나 친합니다. 천성을 타고난 규남은 누구에게도 험한 소리를 하지 못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쉬는 날 남자 셋이 놀이 공원에 가 티 없이 밝은 모습으로 놀이기구를 타는 모습은 기괴한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일을 맞은 규남에게 점퍼를 선물하는 알과 버바에 한없는 행복을 이야기하던 규남은 차에 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큰 사고였는데 엄청난 회복 속도를 보이는 게 더욱 신기한 일이 되었습니다.

사고로 폐차장에서 쫓겨난 규남은 구인지를 통해 유토피아라는 전당포에 취직을 하게 됩니다. 나쁜 전력하나 없이 깨끗한 규남이 마음에 들었던 주인은 바로 채용하고, 자신에게 일어났던 신기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철저하게 기록되어진 삶을 살았던 자신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바로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데 돈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최첨단 기기인 CCTV를 설치했다며 자랑스러워 하지만(CCTV는 아무런 해결도 해주지 못한다며 전국을 CCTV로 통제하려는 사회를 비꼬기도 하지요) 그런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둘이 전당포에서 만나게 되며 초인들의 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영화는 초인과 초인의 대결이 지속됩니다. 힘으로 제압하려는 이와 이에 맞서는 자의 싸움은 누군가 완벽하게 끝이 나는 순간까지 쉼 없이 이어질 뿐입니다.

2. 절대 권력에 맞선 소시민들의 힘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는 높지는 않습니다. 국내에도 유명한 미국 드라마인 <히어로즈>의 캐릭터들을 차용한 듯한 느낌도 듭니다. 절대 악으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일러를 닮은 초인과 모든 능력을 흡수할 수 있는 피터와 유사한 규남의 대결은, 형식은 비현실적이지만 그 대결구도가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 속 절대 권력과 이에 맞서는 소시민의 대결로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자신의 초능력을 눈치 챈 규남 때문에 그 숱한 살인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초인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의 현대사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피로 잡은 정권들은 독재로 이어지고 이는 곧 '탄압과 폭거'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절대 권력인 '독재자를 탓하거나 그들이 독재를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면 독재자는 피를 요구하지도 않았을 텐데'라는 변명과 동일한 초인의 대사들은 모순이 지배하지만 이 역시 여전히 살아있는 독재자의 모습과 닮아있었습니다.

폭력에 지배당했던 어린 초인은 그런 아버지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성장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은 잔혹한 독재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인 그가 가장 순수한 남자를 만나며 모든 것이 틀어져버렸듯 독재의 폭거에 맞선 대중을 상징하는 이 구도는 무척이나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배경들은 하나같이 도시의 화려함이 아닌 어둠이었습니다. 폐차장과 낡은 건물들, 지저분한 골목 등 화려한 서울의 도심과 자본으로 만든 아름다움은 이 영화에는 단 한 컷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이들과 이를 조정하는 초인의 구도는 권력을 쥐고 서민들을 옥죄는 우리시대의 절대 권력에 대한 풍자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초인이 귀찮은 듯 "그저 모른 척 하면 될 것을 죽을힘을 다해 자신을 막아서는 너는 뭐냐"라는 질문에 잘못된 권력에 맞서 너무나 평범한 삶 즉, 정의가 지배하고 모두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주어진 세상을 원하는 소시민의 바람을 규남은 대변하고 있습니다.

절름발이 괴물로 등장한 초인은 철저하게 왜곡된 힘으로 대중을 기만하고 조정하려는 절대 권력자를 비유하는 캐릭터입니다. 외형적인 기묘함에 그럴듯한 외모와 그 안에 숨겨진 지독한 악마성은 바로 우리 시대 권력자의 모습과 일치하고 있어 더욱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초인들에 의해 죽어가는 이들은 모두 평범한 존재들뿐입니다. 낡은 아파트의 서민들이 집단으로 죽음을 당하고 이주노동자들이 규민을 돕다 초인에게 죽음을 당합니다. 공권력 역시 말단 형사와 순경들이 전부일 뿐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이들이나 재벌들은 초인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가 돈을 얻어내는 곳도 전당포나 조그마한 사채업자들 사무실일 뿐입니다.

비록 마지막으로 은행을 털지만 그 은행 역시 서민들에게 고리대금을 받는 사채없자나 다름없는 존재들일 뿐이지요. 힘없고 나약한 존재들의 피를 먹고 비대해지는 권력을 비유하는 듯한 이 설정들은 영화적 완성도가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초능력자>를 특별하게 볼 수밖에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규남의 모습은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절대적인 힘을 가지게 된 규남이 어떤 식으로 힘을 사용하는지 보여주는 이 장면은 비현실적이어서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도덕책에나 나올법한 상황은 현실에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꿈같은 것이기 때문이니 말이지요.

장편 데뷔작을 연출한 김민석 감독은 스스로 각본까지 써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첫 작품이 범하는 아쉬움들이 존재했지만 세상에 대한 비유는 탁월한 감각으로 다가왔습니다. 절대적인 카리스마인 강동원과 고수를 효과적으로 매치 업 시켜 흥미를 유발한 것 역시 그의 능력이겠지요.

폭력은 대물림 되고 증폭되어 더욱 큰 독재가 진행될 수밖에 없음을 영화는 초인을 통해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보이지 않는 힘으로 지배하는 그에게도 틈은 존재하고 가장 순수하게 정의를 꿈꾸는 청년에 의해 그 절대적인 힘은 파멸로 향합니다. 절대 권력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음을 잘 보여준 <초능력자>는 힘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긍정적 메시지를 던져주었습니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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