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 것처럼 이 드라마의 원작은 박인권의 성인용 만화입니다. 본래는 그냥 생각 없는 한량이었던 제비가 아버지의 비극을 접하고 개과천선하는. 하지만 그 방식은 엉뚱하게도 곰탕 끓이는 실력을 활용하며 어떻게든 여자 한 명을 잡아서 한몫잡아보려던 것에서 출발한, 정말로 허무맹랑한 설정에서 시작한 이야기이죠. 한 터울만 지나면 자극적인 야한 장면이 넘실거리고, 주요 인물들은 못하는 것이 없는 천하무적, 각종 허무맹랑한 설정들로 가득한데다가 마지막에는 애국심에 호소하는 민망한 전환까지 이어지는, 그냥 전형적인 대본소 만화의 공식에 충실한 내용이에요.

그럼에도 이 만화가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이야기가 돌 때부터 무수히 많은 여배우들의 관심을 끌며 화제에 오르내렸던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박인권의 전작 ‘쩐의 전쟁’이 공전의 히트를 누린 데에다가, 한 여성이 대한민국의 여자 대통령으로 오른다는 매혹적인 설정 덕분이었겠죠. 하지만 그 이전에 그 원작이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이 무척이나 연기할 만한 매력을 가진, 재미난 인간상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점에 올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각종 욕망과 이해관계가 꿈틀거리는 전쟁판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모습이 내뿜는 힘은 배우라면 한번쯤 내 것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거든요.

저마다 잘난(너무 과도할 정도로) 사람들이지만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한, 이 권력의 전쟁터에서는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 됩니다. 자기 힘만을 의지해서 싸우면서 각종 추악하고 더러운 덤탱이도 마다하지 않죠. 서로를 속고 속이고, 신뢰하고 다시 배신하면서 내용을 쌓아 올리는 이 만화에서 중심추는 하도야를 중심으로 오락가락 움직이며 혼선을 일으킵니다. 마지막은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의 대의 앞에, 그녀에게 배신당해 복수의 칼날을 갈던 하도야마저도 무너져버리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그 결론이 주는 감동과 만족감은 복잡했던 갈등과 과정이 없다면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을 거에요.

하지만 드라마 속사람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형편없습니다. 이렇게 한 가지 모습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지, 이렇게 단순하고 멍청한 이들이 과연 대한한국을 이끌어가는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 전혀 납득이 가질 않아요. 서혜림과 하도야, 대통령은 한량없이 정의의 편에 서 있기만 하고 그들의 맞상대인 조배호 대표는 그냥 거악의 표상일 뿐입니다. 별다른 특징도 없고, 개성도 없이 그냥 착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둘로 나뉘어서 서로 하고 싶은 말만을 잔뜩 늘어놓는 것에 불과해요.

그중에서도 고현정의 서혜림은 망가지는 속도가 끔찍할 정도입니다. 그녀가 늘어놓는 말들은 모두 이치에 어긋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한 노력이란 아무것도 없죠. 여자라고 무시하는 것에 반발하고, 절망스러운 현실에 울분을 토해내지만 그냥 교과서에 있는 원칙만을 말하고 무작정 때를 쓰는 것 이외에 그녀가 하고 있는 것은 권상우나 차인표, 혹은 이순재 같은 다른 이들의 호의와 도움에 의지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현재 그녀가 이 드라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그런 한숨만 나오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똥물을 뒤집어써가며 움직이는 차인표나 대통령이 간직하고 있는 초심을 바락바락 우기는 그녀의 모습이 기특하고 귀여워서 간직하고 싶은 온실 속의 화초. 그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소속 정당 대표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고통 받는 지역구 사람들을 위해 한다는 짓은 고작 국회의원직 사퇴이고, 이마저도 이리저리 밀리면서 슬그머니 철회되었습니다. 정치 현실에 분노하고, 이대로는 소신도 양심도 지칠 수 없다는 것을 자인하면서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내놓는 방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자라고 무시하는 지방 공무원 앞에서 한다는 실력행사라는 게 고작 그녀가 그토록 퇴출해야 한다는 대표에게 거는 거짓 전화 한 통이고, 다시 국회의원 재선을 위해 공천 추천을 받았지만 그 역시도 다른 정치인들의 파워게임을 위한 장기 말 노릇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죠. 이래서야 그녀가 왜 대물인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그녀의 어떤 능력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별다른 야심도 계획도 책임감도 능력도 없이 답답하고 뻔하기만 한 그녀가 내뱉는 말들은 어떤 감동도 무게감도 없이, 공감도 주지 못하고 그냥 사라져 버립니다. 연기하는 고현정의 모습 역시도 하도야와의 어설픈 러브라인 때보다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현실에 대한 절망을 표시할 때가 훨씬 더 딱딱하고 어색하구요. 차라리 그냥 최초의 여자 대통령은 포기하고 납득이 가는 분노에 가득한 차인표를 대통령으로, 그리고 다른 한쪽에 고현정을 러브라인에 더 빠져들도록 만드는 게 더 나아 보여요. 원작을 넘는 드라마는 찾기 힘들고, 갈수록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것이야 한국 드라마의 특징이라지만, 내용과 캐릭터가 무너지는 것도 정도가 있지. 대물처럼 이정도로 처참하게 붕괴되는 드라마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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