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최고의 오락 영화로 평가받는 <다크나이트>. 저는 특히 엔딩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침묵이 수호자이자 우릴 지켜보는 보호자, 그는 바로 어둠의 기사란다.(He's a silent guardian, a watchful protector…a dark knight.)”라는 고든 형사의 말과 함께 영화는 끝납니다. 스크린이 어두워졌을 때,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관객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감동의 도가니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질 못했습니다. 정말 긴 여운을 남기는 멋진 엔딩이었거든요.

하지만 가슴 한 구석이 찜찜했습니다. 고든의 멋진 대사가 등장하기 전의 묘한 상황 때문이었죠. 영화가 끝나기 직전, 배트맨은 하비덴트가 범죄자였단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 경찰들을 죽인 걸로 합시다. 당신도 나를 쫓고 나를 비난하고 개들을 풀어 나를 추적하시오.” 현재 고담 시에는 영웅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배트맨은 진실 대신 거짓 희망을 선택했습니다. 배트맨은 말합니다. “진실만으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어. 가끔은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가끔은 사람들에게 믿음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니까.”

▲ 재미작가 김은국의 소설 순교자
재미 작가 김은국의 소설 <순교자>에도 배트맨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순교자>는 6.25 동란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입니다. 6.25 발발 당시 평양에서 목사 14명이 공산당에게 끌려갑니다. 그 중 12명이 죽고, 오직 신 목사와 한 목사만이 살아서 돌아옵니다. 모든 신도들은 죽은 12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추앙합니다. 반면 신 목사는 배신자 유다라고 비난받았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전말은 신도들의 믿음과 달랐습니다. 사실 죽은 12명의 목사 중 일부는 목숨을 구걸하며, 신을 버리고 동료들을 배신했던 것입니다. 신념을 끝까지 지킨 사람은 오히려 신 목사뿐이었습니다. 진실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이 대위는 신 목사에게 진실을 세상에 알리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신 목사는 교인들에게 자신이 배신자 유다였다고 인정합니다. 심지어 신도들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이 대위는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목사님, 무엇 때문이죠?” 나는 다시 절망에 잠겨 말했다. “왜 사람들을 속이는 겁니까?”’ (P.254) “희망 없이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인간은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 희망과 약속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 (하긴 이게 사실이지만) 다른 데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요. 하늘나라 하나님의 왕국에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P.271) 신 목사 역시 배트맨과 마찬가지로 진실 대신 거짓 희망을 약속했습니다. “절망은 이 피곤한 생의 질병이오. 무의미한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질병입니다. 우린 절망과 싸우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린 그 절망을 때려 부수어 그것이 인간의 삶을 타락시키고 인간을 단순히 겁쟁이로 쪼그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P.255)

<순교자>는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을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다시 말해 실존주의 철학의 응용서 쯤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순교자>가 던지는 핵심 질문은 바로 이겁니다. “절망 밖에 남아있지 않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실제로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당시 지식인들은 현실에서 어떠한 희망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이성과 종교로 대변되던 가치 참조체계가 붕괴되면서, 절망의 허무주의가 세계를 뒤덮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비극의 한 가운데서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세상에 명증(明證)을 요구했지만 세상은 증명될 수 없는 것 투성입니다. 이제 세상은 신이 창조한 아름다운 세계도, 이성의 법칙에 지배되는 정교한 세계도 아니었습니다. 세계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암흑의 덩어리, ‘아무 것도 아닌 존재(Nothing)’ 그 자체였습니다. 자연히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할 때 발생하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악령>이란 소설에서 ‘인간은 단지 자살하지 않기 위해서 신의 존재를 꾸며 냈다. 이것은 현재까지의 우주 역사의 요약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배트맨도, 신 목사도 진실을 드러내기보다는, 거짓 희망을 퍼트리고자 한 것이죠. 그렇다면 극한의 절망에서 만난 거짓 희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진실을 요구한 이 대위의 생각과 교인들을 끔찍이 사랑한 나머지 거짓 희망을 심어준 신목사의 신념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순교자>에서 한 목사는 ‘목사님의 신은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란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미쳐버리고 맙니다. 민 소령의 아내 역시 자기가 믿던 거짓 희망이 무너지자, 절망 속에서 목숨을 잃고말고요. 때문에 절망의 질병을 쫓기 위해 거짓 희망이 필요하다는 신 목사의 주장은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신경 하나가 왠지 모를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다크나이트>의 결말을 불편하게 만든 것도 이 작은 신경의 작용과 연관이 있습니다. 내 안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거짓 희망은 우리 삶에서 절망을 앗아갈지 모르지만, 희망이 거짓이란 점에서 ‘거짓 희망’은 기만이다. 기만당하는 삶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진실을 모른 채 매트릭스 안에서 살아가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때문에 거짓 희망 속에 살아간다면, 육체는 온전할지 몰라도 정신은 죽은 것이다. 때문에 거짓 희망의 기만 속에 살아가는 삶은 일종의 정신적 자살이다.”

배트맨과 신 목사는 인간의 적응능력을 애초에 과소평가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분명 인간의 이해력은 유한합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알거나 이해할 수 없죠. 동시에 인간의 이해력은 세상의 법칙 앞에서 무력합니다. 때문에 인간의 눈에 비친 세상은 무한히 부조리해 보일 수 있습니다. 반면 인간의 의지는 무한합니다. 우린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무(無)’의 세계일지라도,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운 행동으로 자기만의 의미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빨간 알약을 선택하고, <시>의 미자가 시작(詩作)을 통해 손자의 죄를 반성했듯, 인간에게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행동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기가 막힌 능력이 있습니다. 부조리의 절망 속에서도 인간이 좌절하지 않을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죠. 인간은 곧 자신이 선택한 행동을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순교자>의 고 목사는 부산 인근의 섬에 작은 교회를 세웁니다. 거기서 피난민을 돌보고 기독교를 전파합니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지만, 천막을 세워 사람들을 받아들입니다. 절망 속에서 고 군목은 목자 활동을 통해 자유를 무한히 드러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소진하겠다는 열정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고 군목의 태도는 결코 피난민들에게 거짓 희망을 심어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 활동을 통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돌보고, 그 속에서 진정한 희망을 찾아내려는 시도입니다.

<순교자>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거기에는 또 다른 한 무리의 피난민들이 별빛 반짝이는 밤하늘을 지붕 삼고 모여 앉아 두고 온 고향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신기하리만큼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결국 세계의 절망 속에 괴로워하던 이 대위도 결국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진정한 희망의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무한한 의지력과 열정은 ‘세상은 무(無)’라는 절망의 현실을 정면으로 맞서게 하고, 더 나아가 반항하게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거짓 희망 속에 사는 삶이 ‘미래만을 생각하며 사는 삶’이라면,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도 열정적으로 행동하는 삶은 ‘현재를 치열하게 사는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왜 사는가?’란 질문에 답을 못해 괴로워할 필요 없습니다. 어쩌면 애초부터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 있거든요. 질문을 바꿀 때입니다. 이제 ‘왜 사는가’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의 고민을 시작해야 합니다.

책, 영화, 여행을 통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는 부지런한 블로거, ‘알스카토’입니다. (http://blog.naver.com/haine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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