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도우리 객원기자] 기자든 소설가든 평론가든, 작가라면 누구나 사람들 앞에서 칭찬받은 첫 글을 잊지 못할 것이다. 필자에게도 그런 글이 있다. 철학과 학부생 시절 제출한 과제였는데, 교수와 학우들에게 칭찬받고 과 내 논술대회에서 우수상도 수상한 소논문이었다. 제목은 <눈썹 옆의 점을 지우지 않은 이유>였다.

그 글의 발단은 점쟁이의 조언이었다. 연애가 너무 힘들어 찾게 된 점집에서 눈썹 옆의 점이 연애운에 나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절박한 심정에 피부과를 가려다 문득 ‘연애운’이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결국 연애와 운명(명리학) 모두 사회 구조적 맥락으로 짜인 일종의 담론이며, 그 담론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 점을 뺄 수 없었다는 요지의 글을 쓰게 되었다.

흔히 연애의 아픔은 젊은 날 치르는 홍역 정도로만 치부된다. 하지만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청년 문제를 ‘청춘’이라는 감상적 어휘로 윤색한 것처럼, 연애의 어려움 역시 ‘사랑’으로 퉁쳐져 온 것은 아닐까. 실은 그동안 ‘연애’를 제대로 질문한 적 없다는 고백이 아닐까.

김신현경 '이토록 두려운 사랑' 출판사 반비

김신현경 여성학 박사가 쓴 <이토록 두려운 사랑>은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연애란 대체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파고든 책이다. 영화 <접속>에서 웹툰 <치즈 인 더 트랩>까지 대중문화 텍스트를 통해 우리 시대의 연애를 질문한다. 젠더· 섹슈얼리티·계급·시대·국가를 넘나든다.

“한마디로 이제 더 이상 ‘남자’인 것만으로는 여자들보다 우위일 수도 없고, 최소한 한 명의 여자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는 시대입니다”

‘연애’라는 관계 맺음은 근대에 나타난, 역사상 최근의 일이라는 점은 이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는 90년대 연애의 급부상은 세계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후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된 시기, 우리나라에서는 1987년 민주화 이후 개인성과 새로운 친밀성에 대한 열망 덕이었다고 밝힌다. <비포 선라이즈(1996)>, <첨밀밀(1997)>, 그리고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처럼 수많은 연애 영화들이 제작되고 수입된 이유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작품을 살펴보면 자유롭고 평등하게 만나는 듯한 남녀들이 실제로는 불평등한 조건에 놓여 있다고 분석한다.

“(<접속>에서) 은희의 성적 자유분방함을 프리랜서라는 고용 형태와 등치시킨다거나, '작가는 선택할 권리도 없나요?'라는 말을 두 프로듀서 사이에서 선택권 없이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노동조건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 연애 상대에 대한 마음으로 표현한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JTBC <청춘시대>에서) 남성의 경우, 생계부양자로서의 능력과 연결되는 학력, 학벌, 직업은 여전히 연애 관계에서 매력의 핵심 요소입니다. 그러니까 남성들은 성인이 되어 경제적으로 독립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획득하는 사회적 위치와, 연애 관계에서 매력적인 남성이 될 가능성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여성들의 경우는 (…) 이런 능력보다는 ‘예쁘고 여성스러운 성격’으로 요약되는, 외모와 남성을 보완할 수 있는 성격이 더 필수적입니다. 이 드라마에서도 남성들은 여전히 여자 친구에게 ‘오빠’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고, 학력과 학벌이 상대 여성보다 좋지 않을 때 자격지심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 시대의 연애란 “새로운 남녀 불평등 현실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모순적 기대가 극화되는 장”이라고 주장한다. 남성들은 이제 이상형으로 ‘똑똑하고 자기 소신이 있는’ 여성을 꼽으면서도 ‘자신의 말은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바란다거나, 여성들은 ‘물화된 대상’이 되어야만 ‘사랑하려는 능동적 의지를 발현할 수 있는’ 딜레마 속에서 한편으로는 구속적인 관계를 원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것을 데이트 비용을 꼽는다.

“이제 남성들은 데이트 비용을 혼자 부담하며 예비 생계부양자로서의 능력을 뽐내려 하지 않아요. 공평하게 나눠서 부담하길 원하지요. 동시에 이를 남성으로서의 관계 주도권을 잃는 것으로도 인식합니다. 그 결과 이들이 원하는 방식이 재미있어요. 개인별로 차이는 있겠으나 대체로 결제는 남성 자신이 먼저 하고 데이트 통장에서 더 낸 몫을 가져가거나 여성이 계좌이체를 해주는 등, 자신이 주도적으로 부담한 티는 내고 실제 몫은 나누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저자는 나쁜 남자 판타지, 로맨스의 상품화·상품의 낭만화, 조건만남, 빠순이 문화 등의 주제를 아우르며 봉제선 없이 엮어 나간다. 평소 연애에서 궁금했던 점들을 골라 읽는 재미가 있다.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동아시아권에만 있는 ‘고백(대시) 문화’에 대한 분석이었다.

고백 문화란, 연애가 꼭 결혼 전 단계를 의미하지는 않게 되면서 성관계에 대한 소위 ‘책임’을 문화적으로 합의하기 위해 생겨난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 문화에서는 “상대방이 내가 절대로 소유할 수 없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타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가능한, 말하자면 커뮤니케이션의 근원적 불가능성 속에서 추구하는 일시적 가능성의 세계”인 플러팅과 유혹의 섬세한 기술이 발달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저는 평등한 연애, 페미니즘적 연애야말로 플러팅과 유혹이 넘치는 흥미진진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에서도 역할로 환원되지 않는, 평등하고도 모험 가득한 관계에 대한 상상과 이야기가 더 풍부해지길 기대합니다”

여담으로, 나는 서두에 언급한 글을 쓴 몇 개월 뒤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났다. 그 사람과는 몇 년간 행복할 수 있었다. 그가 결정적으로 나에게 반한 계기는 그에게 보여준 글, ‘눈썹 옆의 점을 지우지 않은 이유’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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