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대 스포츠 축제' 아시안게임은 햇수로 60년을 자랑하는 전통 있는 종합 스포츠 경기 대회입니다. 지난 1951년 인도 뉴델리에서 처음 개최된 이래로 16회를 맞이한 아시안게임은 올림픽 못지않은 감동과 짜릿함을 선사하며 온 국민을 웃고 울렸습니다. 특히 TV로 스포츠 중계가 활성화되고 우수한 선수들이 대거 두각을 나타내며 아시아 2위를 굳히다시피 한 1980년대 이후에는 더욱 감동적인 장면이 많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스포츠 스타 탄생을 알린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제 16번째 아시안게임 개막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이야기들이 우리 앞에 선보일지 기대됩니다. 4회 연속 2위도 중요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멋진 플레이로 감동을 선보일 선수들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지는 이번 대회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15번의 아시안게임 가운데서 우리의 기억 속에 여전히 깊게 남아있는 경기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역대 아시안게임에서 우리가 기억해 볼 만한 명장면들을 이 기회에 끄집어내 추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춘애의 감동 레이스, 탁구의 기적 - 1986 서울 아시안게임

한국이 아시안게임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때였습니다. 물론 역대 최고 금메달은 지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96개를 따낸 것이었지만 1위 중국과의 격차를 따지고 보면 1986년 서울 대회가 단연 돋보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금메달을 93개 따내며 중국에 단 1개 차로 아깝게 모자라 종합 2위에 올랐는데요. 아쉽게 2위를 하긴 했어도 연일 계속 되는 금메달 행진에 대회 내내 서울은 축제 분위기나 다름없었고, 2년 뒤에 있을 서울올림픽에서의 선전을 충분히 기대할 만한 장면들이 많이 나와 많은 기대감을 갖게 했던 대회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임춘애 선수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무엇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바로 여자 육상 중장거리에서 금메달 3개를 따낸 주인공 임춘애의 역주였습니다. '평소에 즐겨먹는 음식이 라면'이라는 말이 '라면만 먹고 자랐다'로 와전돼 한때 '라면소녀'로 알려진 임춘애는 가난한 가정 환경, 무명과 다름없는 지도자 아래서 혼신의 역주를 펼치며 꿈을 키운 17살 육상 소녀였습니다.

사실 그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육상계 내부에서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그녀가 두각을 나타냈던 것은 바로 800m 결선에서였습니다. 당시 임춘애는 인도 선수에 이어 2위로 들어왔지만 1위로 들어온 인도 선수가 경기 규정 위반으로 실격되면서 '행운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후 임춘애의 '진짜 실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자 1500m에서 무서운 막판 스퍼트로 앞서 나가는 선수를 모두 제치며 1위에 오른 것입니다. 그때부터 임춘애는 제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육상계에서도 그제서야 그녀를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임춘애는 여자 3000m에서 또다시 우승을 차지하며 관중들의 엄청난 박수를 받았습니다. 육상에서 3개나 금메달을 따낸 것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 갸날픈 몸으로 최선을 다하는 역주를 펼친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3000m를 달린 뒤 경기장 트랙에 쓰러진 뒤 힘겹게 운동화, 양말을 벗고 맨발로 트랙을 돌며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는 장면은 당시 서울 대회뿐 아니라 역대 아시안게임 최고의 명장면으로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을 모 스포츠 케이블 방송에서 다시 보여줬을 때 시청했는데 상당히 가슴이 뭉클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후에 슬럼프, 부상 등으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임춘애였지만 당시 서울 아시안게임 최고의 스타나 다름없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임춘애와 더불어 또 하나의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던 종목이 있었으니 바로 남녀 탁구 대표팀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나 지나 탁구 최강국하면 중국이 떠오를 것입니다. 당시에도 중국은 한국이 넘기 힘든 벽과 같았고, 결승전에서 만나도 어려운 경기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남녀 단체전에서 믿기 힘든 금메달을 따내며 전국을 열광시켰습니다.

특히 남자 탁구팀의 선전이 대단했습니다. 9전 5선승제로 치러진 경기에서 4-1로 앞서며 우승을 눈앞에 뒀던 한국은 잇달아 세 선수가 패하면서 4-4 균형을 이루며 운명의 마지막 판을 기다렸습니다. 이 경기에 나온 안재형은 후이준과 1-1 균형을 이룬 뒤 3세트에서 21-16을 거두는 파란을 일으키며 마침내 아시안게임 첫 탁구 금메달의 쾌거를 이뤘습니다. 5시간 20분이라는 긴 시간 속에 치러진 명승부에서 금메달을 따낸 한국 탁구는 이 상승세를 이어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남자 단식 유남규, 여자 복식 현정화-양영자 조가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아시안게임에서의 선전으로 한국 탁구는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한 열기를 자랑했고, 최고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잇달은 한일전 명승부, 그리고 쾌거 -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개인적으로 아시안게임을 처음 본 대회는 바로 1994년 히로시마 대회 때였습니다. 원래 이 대회에서 한국은 종합 2위를 차지했지만 대회 폐막 이후 중국 수영 선수들의 무더기 약물 복용으로 금메달이 박탈되면서 2위를 차지한 일본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금메달을 이어받아 아깝게 종합 3위로 밀린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지' 일본에서 한국 선수들은 일본 선수들을 만나기만 하면 엄청난 투지를 발휘하며 상당히 기억에 남을 명장면들이 많았던 대회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가장 짜릿했던 한일전 명승부를 꼽는다면 바로 축구 8강전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 체제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있었고, 조별 예선에서 네팔에 11-0 대승을 거두는 저력을 보여주며 가볍게 조별 예선을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8강에서 껄끄러운 상대 일본을 만났고,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습니다. 특히 불과 1년 전, 카타르 도하에서 있었던 월드컵 예선에서 0-1 패배를 당한 아픔이 남아 있어 한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비장한 각오로 이를 설욕해야 하는 판이었습니다.

이 경기에서 주인공으로 떠오른 선수는 바로 '황새' 황선홍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월드컵 부진으로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던 황선홍은 깔끔한 헤딩골과 패널티킥 결승골로 한국의 3-2 승리를 이끌어내며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한 번 알리는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황선홍은 2-2로 맞선 후반 45분에 패널티킥을 만들어낸 뒤 자신이 직접 깔끔하게 골을 뽑아내며 혼자 '북치고 장구 치기'를 했습니다. 아쉽게 4강전에서 우즈베키스탄에 불의의 일격을 당하며 금메달을 따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축구 한일전 역대 명승부 베스트 경기로도 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경기를 치러내며 한국 축구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여자 배구 역시 일본을 짜릿하게 따돌리며 금메달을 따내는 저력을 보여줬습니다. 4강에서 중국을 대접전 끝에 3-2로 어렵게 따돌리고 결승에 오른 한국은 일본에 1,2세트를 내주며 불안하게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뒷심을 발휘하며 3,4세트를 따낸 뒤 5세트에서 15-11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둬 기적과 같은 금메달을 목에 거는데 성공했습니다. 워낙 힘겹게 2경기를 이기고 거둔 금메달이어서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선수들이 한데 뒤엉켜 감사의 기도를 올린뒤 눈물을 흘린 장면은 지금도 배구팬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습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영웅' 황영조의 금메달은 이 대회 최고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당시 최고의 기량으로 금메달에 도전한 황영조는 일본이 자랑하는 마라토너 하야타 도시유키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35km 지점에서 치고 나가는 전략으로 하야타를 따돌리며 2시간 11분 13초로 골인해 금메달을 목에 거는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일본 선수들을 따돌리기 위해 황영조와 함께 출전한 김재룡(동메달 획득)이 전략적인 레이스를 펼친 끝에 상당히 값진 금메달을 수확하며 1945년 원폭에 희생을 당한 징용 한국인들의 한(恨)을 풀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선수단 선전기원 메시지 남기기 현장 응원이벤트'에서 육상스타출신인 황영조, 장재근 씨와 시민들이 함께 금메달트리를 만들고 국가대표선수들의 선전을 기원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익 광고로도 소개된 럭비의 기적 -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척박한 환경에서도 기적 같은 우승을 일궈낸 사례들이 유독 아시안게임에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돋보였던 것은 바로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7인제, 15인제 모두 금메달을 휩쓴 남자 럭비 대표팀이었습니다. 등록 선수도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이렇다 할 훈련장 없이 맨땅에서 훈련을 거듭한 럭비 선수들은 시련을 딛고 오로지 조직력, 정신력으로 승승장구를 거듭하다 일본을 연달아 따돌리고 2개의 금메달을 따내는데 성공, 한국이 8년 만에 다시 종합 2위를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습니다. 당시 럭비 대표팀의 투혼은 공익 광고로도 소개돼 IMF 구제금융 문제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만리장성을 넘은 한국 농구의 빛나는 투혼 - 2002 부산 아시안게임

4년 뒤 열린 부산 대회에서는 남자 농구의 투혼이 단연 빛났습니다. 4강전에서 필리핀을 접전 끝에 이상민의 버저비터 골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결승에 오른 한국이 '만리장성' 중국을 넘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때 20점 차까지 뒤지다 야금야금 따라붙기 시작하더니 4쿼터에서 10점 차 이내로 점수 차를 줄였고, 경기 종료 2분 전부터 하나둘씩 더 따라붙어 승부를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끌고 갔습니다.

여기서 수훈갑 역할을 해낸 선수는 바로 날쌘돌이 가드 김승현이었습니다. 잇달은 스틸과 수비 성공으로 공격권을 따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승현 덕에 한국은 추격의 고삐를 더 잡아당겼고 마침내 경기 종료 4.7초 전 현주엽의 극적인 레이업슛으로 90-90 동점을 만들며 승부를 연장으로 몰고 갔습니다. 사직체육관은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고, TV로 경기를 지켜본 시민들 역시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의 감동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연장전에서 한국은 이미 사기가 떨어진 중국을 계속 해서 몰아부쳤고, 결국 102-100으로 대역전극을 만들어내며 20년 만의 금메달 획득에 성공했습니다. 서장훈, 문경은, 이상민, 전희철, 현주엽, 김승현, 방승윤 등 초호화 멤버들이 일궈낸 금메달이라 눈부셨던 면도 있었지만 프로 선수들의 금메달에 대한 의지, 투혼이 무엇보다 참 대단했던 승부로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습니다.

아시안게임으로 뜬 스타들- 조오련, 최윤희, 장재근, 야구 드림팀

아시안게임에서 나타난 명승부도 명승부지만 아시안게임을 통해 배출한 스타들 면면도 참 화려했습니다. 물론 이 선수들은 나름대로 척박한 환경에서 엄청난 노력으로 값진 성과를 낸 선수들이었습니다. 1970년과 74년 대회에서 2회 연속 2관왕에 오른 수영 스타 조오련, 1982년 뉴델리 대회에서 3관왕, 1986년 서울 대회에서 2관왕에 올랐던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 역시 1982년과 86년 두 대회 연속 남자 200m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아 최고 스프린터라는 찬사를 받았던 장재근,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에 오르고 홀로 메달 7개를 따내며 대회 전체 최우수선수(MVP)상을 수상한 박태환 등이 바로 기초 종목 위상을 다지는데 아시안게임에서 큰 역할을 해낸 선수들이었습니다.

야구 드림팀도 빼놓을 수 없는 아시안게임 단체팀이었습니다. 지난 1998년 방콕 대회에서 첫 선을 보인 야구 드림팀은 당시 박찬호를 앞세워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인 끝에 첫 금메달을 따내며 온 국민을 열광시켰고, 다음 대회였던 2002년 부산 대회에서도 강한 전력을 앞세워 또 하나의 금메달을 수확해 야구 강국의 기틀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1998년 대회에서는 성균관대 1학년에 재학중인 김병현이 중국과의 경기에서 여덟 타자 연속 삼진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내면서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로부터 주목받는 계기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구기 종목 빛났던 순간들

단체 종목인 구기 종목에서 빛났던 순간들도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이 많습니다.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축구는 북한과 사상 첫 맞대결을 벌여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공동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비록 단독 우승은 아니어도 북한과 사상 첫 맞대결에서 의미 있는 공동 우승을 이뤄내며 한민족 축구의 가능성을 아시아 전역에 널리 알렸습니다. 또 '비인기 종목'의 시련을 딛고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연속 우승을 차지한 하키, 핸드볼의 선전도 대단했고, 2006년 아시안게임에서 프로 스포츠의 전멸 속에서 유일하게 신바람 나는 우승을 이뤄낸 남자 배구의 쾌거도 기억에 남는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안타까웠던 순간들

물론 기억에 남을 만한 순간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땀방울을 흘리며 아시안게임을 준비했음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해서 메달을 놓친 선수, 다 잡은 승리를 놓치고 아쉽게 패하며 눈물을 흘린 선수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는 한국 남자 핸드볼이 중동 심판들의 어이없는 편파판정으로 메달조차 획득하지 못하는 아픔을 맛보며 한동안 상당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안타까운 일들도 있었습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남자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100kg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송성일은 위암 투병 중으로 상당한 복통 속에서도 값진 금메달을 따내 그야말로 드라마를 썼습니다. 그러나 금메달을 따낸 지 3개월 만에 암을 극복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생을 마쳤습니다. 또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는 승마 베테랑 김형칠이 경기도중 불의의 낙마 사고로 세상을 떠나 한국선수단 뿐 아니라 전 출전국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모두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투혼을 불사르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 한 그 모습만큼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양산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아시안게임, 그리고 대한민국 스포츠. 앞으로 5일 뒤에 열릴 제16회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또 어떤 희망 가득한 이야기들이 온 국민을 웃게 할 지 관심이 모아집니다. 경기 결과가 좋으면 물론 좋겠지만 각 종목에서 후회 없는 승부를 펼치며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만으로도 많은 국민은 박수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번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새로운 꿈과 희망이 가득한 한국 스포츠의 면모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대회로 기억에 남기를 기대해 봅니다.

대학생 스포츠 블로거입니다. 블로그 http://blog.daum.net/hallo-jihan 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스포츠를 너무 좋아하고, 글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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