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윌리스가 말투부터 외모까지 껄렁껄렁하던 존 맥클레인을 연기한 지 어언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때 한 무더기의 악당들을 상대로도 펄펄 날아다니던 그의 얼굴에는 이제 주름이 깊게 패였고, 당시에도 숱이 적었던 머리카락은 아예 대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브루스 윌리스를 보면 1995년에 출연했던 <다이 하드3>의 존 맥클레인으로 적역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2007년에 <다이 하드4>에서 다 죽어가던 시리즈를 렌 와이즈만과 함께 훌륭하게 되살리기도 했으니,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습니다.

이번에 출연한 영화 <레드>는 이런 브루스 윌리스에게 참으로 잘 어울립니다. 그는 이 영화에서 한때 전설적인 CIA 요원이었으나 나이가 많아 은퇴를 하고 연금을 받으며 살아가는 프랭크를 연기합니다. (물론 현실 속의 브루스 윌리스는 은퇴한다고 해도 연금을 받을 형편은 아니지만 ㅎㅎ) 집안일을 하며 무료한 여생을 보내던 프랭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CIA로부터 살해위협을 받게 되면서 각지에 흩어져있는 옛 동료들을 모아서 복수를 감행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얼핏 얼마 전에 국내에 개봉했던 <A 특공대>의 그것을 연상시키죠? 하지만 <레드>는 이때부터 약간의 변주를 보여줍니다.

으레 이런 상황이라면 브루스 윌리스가 연기한 프랭크가 연장자에 팀 리더로 꼽히는 게 보통이지만 <레드>에서는 동료라고 모이는 사람들이 죄다 노인(에 준하는 사람)입니다. 과대망상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마빈, 늘그막에 암 말기로 투병 중인 조, 이제는 단아한 할머니로 살아가는 빅토리아까지 족히 50대 이상인 사람들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활약은 연하들의 그것 이상입니다. 이들은 "노인네"라는 조롱에 발끈할 때마다 그야말로 노익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사실 이를 제외하면 이야기가 새롭거나 눈길을 끌만한 부분이 많지 않지만, 원작이 만화인 것을 감안한 덕분인지 연출이 꽤 경쾌해서 보는 내내 흥겹게 즐길 수 있습니다.

특히! 존 말코비치의 연기를 주목하세요. 물론 그가 코믹 연기를 보여준 게 처음은 아니지만 여전히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로 각인되어있는 제게는 놀랍기만 했습니다. <레드>에서 그는 약간 얼빠진 캐릭터인 마빈으로 출연하는데, 표정연기만 보고 있어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 밖에도 모건 프리만, 헬렌 미렌의 연기도 이 영화의 매력이 될 듯합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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