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임창정을 참 좋아합니다. 정확하게는 그의 연기를 좋아한다고 해야겠네요. 주로 코미디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온 임창정이 보여주는 전매특허의 능청 연기는 언제 어디서나 제게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진지한 모습 - 예를 들어 <스카우트> - 을 곧잘 보여주기도 해서 어딘지 모르게 인간적인 면이 느껴졌습니다. 덕분에 임창정이 주연한 영화는 어지간한 실패작이 아닌 다음에야 최소한 기본은 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불량남녀>를 보고 싶어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으며, 거기에 더해 엄지원의 출연 또한 반가운 영화였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역시 이번에도 코미디 영화로서의 기본은 해주더군요. 모처럼 시사회에서 관객들과 함께 즐겁게 웃다 왔습니다.

도봉구 경찰서의 강력계 형사인 방극현은 어쩌다 보증을 잘못 서서 순식간에 6,700만 원이나 되는 빚더미에 안게 됐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범인검거를 하는 순간에도 빚독촉 전화에 시달리느라 아주 피가 마를 지경입니다. 하루는 소매치기를 잡고 피해자를 불렀는데, 오호라~ 꽤 맘에 드는 아가씨가 왔습니다. 온갖 똥폼 다 잡은 덕에 친절하다는 말부터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까지 들은 방극현은 한껏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이 여자가 자신의 철천지원수라고 불러도 무방할 여자, 즉 허구한 날 빚독촉 전화를 해대던 김무령이었습니다. 서로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증오를 퍼붓지만 모종의 일로 인해 서로에게 약간의 신뢰를 가지게 되고, 이때부터 조금씩 사랑을 키워나가는데...

사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불량남녀>는 썩 괜찮은 영화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다 보니 대강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짐작을 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결말이야 더 뻔하죠. 이런 류의 영화가 대개 그러하듯이 <불량남녀>도 결국 우연이 우연을 낳으면서 논리적인 설득력이나 개연성은 다소 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영화란 모름지기 비슷한 줄거리를 가지고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달렸습니다. 이럴 때 제가 흔히 쓰는 말이 "같지만 똑같지는 않게"라는 것입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동일한 시나리오와 스탭, 출연진 및 기타 제반조건을 가지고도 누가 연출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그 영화는 달라질 수 있는 법이거든요.

물론 코미디 영화도 앞서 말한 논리적인 설득력과 개연성을 철저하게 갖춘다면야 더 없이 좋겠지만, 늘 제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기본에라도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용의 머리가 되려다 꼬리에 붙은 비늘조각에 그치느니 차라리 애당초 욕심을 줄이고 뱀의 머리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다면 코미디 영화의 기본은? 당연히 관객을 웃게 만드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불량남녀>는 적어도 코미디 영화로서의 기본에는 충실한 영화입니다. 또한 코미디 영화의 경우에는 가끔 위의 조건에서 조금은 관대해질 필요도 있습니다. 그리고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관대하게 대하도록 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연출과 배우의 힘인데, <불량남녀>는 그러한 점에서 꽤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불량남녀>는 우선 배우들의 연기가 관객들을 웃게 만들어야 한다는 코미디 영화의 기본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웃기다면 그건 절반 이상이 주연배우의 공이라는 것이 결코 과언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임창정은 예능으로 잠시 외도를 했다가 <청담보살>로 돌아왔으나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었죠. 하지만 그 후로 감을 다시 찾았는지 <불량남녀>에서는 특유의 코믹 연기를 유감없이 펼칩니다. 파트너가 있을 때는 그들과의 호흡을 유지하면서, 파트너가 없을 때는 혼자서 독백을 하면서 그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단연 빛을 발합니다. <스카우트>에서 이미 임청정과 함께 연기했었던 엄지원의 본격적인 코믹 연기도 양념의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항상 단아하고 정적인 이미지로만 여겨지던 엄지원이 이번엔 어떻게 변했는지 한번 눈여겨보는 것도 영화의 재미를 더해줄 겁니다.

배우들의 연기 외에도 나름 흡족했던 부분은 주제의 표출에 있어서 과욕을 부리지 않은 연출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즐거운 한편으로 그만큼 우려가 됐던 부분이기도 하지만, <불량남녀>는 신용불량자라는 사회적인 이슈를 소재로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파고들지 않습니다. 주인공 방극현과 김무령 외의 등장인물 몇 명도 돈에 의해 울고 웃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비극을 통해 뭔가 시사점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것이 영화의 크나큰 단점으로 지적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게다가 감독님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들어간 영화라고 하니 더욱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것을 주연배우들의 호연에 이은 <불량남녀>의 장점으로 꼽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기본에라도 충실하자"는 것과 일맥상통하는데, 우리나라의 코미디 영화는 뭔가 깊은 감동이나 교훈을 안겨줘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자멸을 초래하는 결과를 종종 보여줬습니다. 잘 나가던 영화도 결말부에 다다르면 꼭 균형을 잃으면서 억지를 강요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나 <불량남녀>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만약 웃음과 감동 혹은 교훈을 한데 버무리는 것에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이렇게 단순하게 가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웃기려고 만든 영화라면 일단 웃기고 봐야 할 일이니까요.

다만 <불량남녀>도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을 따라 이야기를 매듭짓는 데 있어서 여전히 과잉은 존재합니다. 의도는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결말을 조금만 더 담백하게 가져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어쨌거나 임창정의 연기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한바탕 웃기 위해 <불량남녀>를 선택하신다면 최소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실 겁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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