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복학생 시절, 공장에 가본 적이 있다. 입대 후 색다른 경험을 하자 했었다. 복학까지는 아직 몇 달이 남아 있었고, 빡빡 깎은 머리도 다 자라지 않았다. 26개월 군 생활을 어찌어찌 견뎌낸 터라 뭐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던 시절, 생활정보지에서 고른 일터는 인천 남동공단의 한 청바지 공장이었다. 면접을 보고 곧바로 일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출근 첫 날부터 만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아침 6시 집 근처를 지나는 통근버스를 타기 위해 5시엔 집에서 일어나야 했고, 통근버스가 이리저리 시내를 돌며 사람들을 태우는 통에 공장에 도착하기까지 보통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출근 첫 날 내게 배정된 첫 작업은 청바지에 흠집을 내는 일. 청바지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정해진 몇 군데에 사포로 흠집을 내서 다음 공정으로 넘기면 청바지에 모래를 세게 쏴준다. 그러면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찢어진 청바지’의 그 터진 자국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오전 8시 반부터 저녁 6시까지 점심시간을 빼곤 줄곧 일인데, 아무리 해도 일감은 줄지 않았다. 그 많은 원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거며, 저 많은 청바지는 누가 입는단 말인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 손을 거쳐 간 청바지 가운데 가장 비싼 건 당시 유명 연예인이 광고에 출연해 유명해진 브랜드로 한 벌에 12만 원을 호가했다. 청바지 가격 따위를 알 턱이 없었던 당시 내 시간급은 3천 원이 채 되지 않았다.

먼지 풀풀 날리는 공장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묵묵히 자기 몫의 일을 한다. 아무도 서로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다. 젊은 축도 꽤 있었지만 4,50대 여성들이 가장 많았다. 밤 9시까지 이어지는 잔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10시. 온 몸이 쑤시는 통에 그냥 곪아 떨어져 버리면 어느새 또 아침이다. 육체노동자의 삶은 고단하다, 는 사실을 불과 하루 만에 온몸으로 체감하고 만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공장 사람들의 삶이 조금씩 보였다. 사람들과 가장 빨리 친해지는 방법은 다들 기피하는 잔업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공장에서 제일 믿음직스러운 내 연배의 형은 돈 벌어서 나중에 가게 하나 차리는 게 꿈이라 했다. 다들 그런 꿈 하나씩 안고 공장 생활을 견디고 있었다. 공장에서 가장 빼어난 외모로 총각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한 처녀는 겉보기와 달리(?) 회식 때마다 술에 취해 매번 못 말리는 행동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 어느 아주머니는 유독 각별한 눈빛으로 나를 아껴주었는데, 해수욕장에서 물에 빠져 죽은 아들 생각에 그러는 거라고 나중에 누군가가 귀띔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곧 떠날 이였다. 한 달을 채우기 전에 우연찮게 들어온 학원 강사 제의를 덥석 받아들이고 만다. 떠나는 이유를 잘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필 계절조차 가을로 쓸쓸히 건너가고 있었다.

임인택 기자의 노동일기에 겹쳐진 내 과거 얘기다. 아침 8시 30분 종소리와 함께 일이 시작되면 하루 종일 똑같은 일을 기계처럼 반복하는 공장 사람들. 지루하고 고단한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미래의 희망 같은 걸 다들 가슴 속에 품고 살기나 하는 것일까. 내가 공장에 머무는 한 달 남짓한 동안에도 수많은 이가 일자리를 찾아 공장에 들어왔지만 상당수는 하루 또는 며칠을 채우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떠났다. 어머니 노동자들은 어쩌다 회식 날에도 잔업이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갔다. 대개는 남편이 없거나 있다 해도 일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돈벌이와 상관없이 집안일도 고스란히 어머니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한 그들의 한 달 벌이는 놀라울 정도로 초라했다. 한 달 내 잔업을 다 채운 숙련공 정도나 돼야 2백만 원 가까이 가져갈 수 있을 뿐, 대부분 150만 원을 넘기기가 쉽지 않은 게 냉혹한 현실이었다. OECD 국가 가운데 멕시코 다음으로 최저임금 수준이 낮다는 이 나라에서 육체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고달픈 일인가. 그때 그 청바지 공장은 어찌 되었을까. 먼지 날리는 작업장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내던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

몇 년이 지나고 보니 어느새 나는 기자가 되어 있었다. 그럭저럭 이 공장 밥을 먹은 지도 어느덧 10년을 헤아린다. 비정규직… 노동빈곤층… 사실 남의 나라 얘기였다. 얼마 전 가깝게 지내는 회사 동료 하나가 갑작스럽게 건강이 나빠져 3주 남짓 병원 신세를 지고 돌아왔을 때, 회사는 병가 처리를 해줄 수 없다 했다. 계약직이기 때문이란다. 어찌어찌 주변의 도움으로 병가를 얻어냈는데, 이번엔 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애꿎은 피해를 입게 된다고 타박이랬다. 동료가 병원에 몸져누워 있어도 얼굴 한 번 내민 적 없는 볼썽사나운 인심이었다. 다시 몸이 아프면 그땐 아예 회사를 나가라고 할 것 같다며 쓴 웃음을 짓던, 핼쑥한 모습의 그 친구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계약직의 설움을 나는 모른다. 우리는 정규직이었던 것이다. ‘발로 뛰는’ 기자가 유능한 기자라면, 내가 무능해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이 책에 담긴 갖가지 사연들은 읽은 내내 나를 한없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기자로서 나는 도대체 지금껏 무엇을 하며 살았던가. “그동안 우리 언론은 누군가의 말을 사실인 것으로 믿고 그에 근거해 사실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만 기사를 써왔다.” 전종휘 기자의 이 말은 가장 뼈아픈 고통으로 다가왔다.

문제점을 충실히 제대로 아는 것이 모든 문제를 푸는 시각이라 했다. 그런데 요는 문제점이 뭔지를 모른다는 데 있다. 주류언론, 기득권층, 정규직… 이 모든 사치 속에서 문제의식과 비판정신은 딱딱하게 굳어져 간다. 임지선 기자 말마따나 “수많은 사람이 빈곤 노동으로 일생을 보내야 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놨다는 점에 있어 우리 모두는 공범이다.” 아니, 구조를 들먹일 것도 없이 보이지 않는 차별과 멸시를 내면화해온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며칠 전 달콤한 휴일 아침의 단잠을 깨운 전화 한 통에 벌컥 화를 내고는 금방 후회를 하고 말았다. 집 앞에 세워둔 차를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는 얘기였다. “하수관 공사를 해야 돼서요. 죄송합니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아버지일 그 역시 휴일 아침부터 전화를 했을 땐 얼마나 미안한 마음이 컸을까. 돈을 벌기 위해, 휴일에도 일을 하기 위해 새벽잠을 쫓으며 일터로 나섰을 그에게 이유도 묻지 않고 벌컥 화부터 낸 일이 두고두고 마음자리를 불편하게 맴돈다. 속 좁은 내 성질머리에 이래저래 상처 받았을 분들 - 시도 때도 없이 청소 한답시고 남자 화장실에 들어온다 생각했던 그 아주머니들, 밥반찬 숟가락 제때 안 가져다준다고 신경질 내는 손님에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던 어머니들, 목이 쉬어라 제품 선전해도 눈길 한 번 받지 못했던 대형마트의 ‘투명인간’ 직원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오는 부끄러움은 복합적이다. 기자로서 이 책의 저자들인 <한겨레21> 기자들이 가진 문제의식과 연대의 정신이 못내 부러웠고, 같은 사람으로서 그들이 만난 “늘 주변에 있는데 우리 눈에서 자꾸 사라지는 사람들”을 너무도 몰랐던 무지함이, 조금이라도 이해해보려 애쓰지 않았던 의지와 의식의 박약이, 메마른 양심과 무책임함이 부끄러웠다. 이 고통스러운 기록을 읽으면서 호명되지 않은 그들의 고통이 비단 그들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못 보고 못 들은 게 아니라, “안 보고 안 들었던 이야기다.” 누구에게는 한없이 불편한 진실일 수도 있는 이 책의 이야기들은 머리말의 한 대목에서 강조한 대로 “우리 사회의 가장 누추한 삶에 대한 그리고 가장 본질적인 모순에 대한 생살 그대로의 기록”이다. <한겨레21>에 연재될 당시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기자들의 생생한 현장 기록을 뒤늦게 접하면서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이 땅의 곳곳에 익명으로 존재하는 이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불러내주어 고맙고, 그들의 존재를 통해 기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부끄러워할 줄 알게 해주어 고맙고, 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많은 이와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책으로 묶어 이렇게 글로 쓸 수 있게 해준 것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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