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동계올림픽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여자계주 결승전이었다. 중국팀의 지저분한 플레이를 극복하고 우승을 차지한 한국팀 에이스 심석희의 마지막 질주는 두고두고 전율과 흥분을 안겨준 명장면이었다. 당시 언론은 여자 쇼트트랙 계주팀을 드림팀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빙상팬들과 국민들에게는 드림팀이었지 몰라도 당사자들에게는 악몽이었음이 드러났다.

당시 중국팀은 ‘나쁜손’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그러나 진짜 나쁜 손은 중국이 아닌 한국팀 지도자였다. 4년 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쇼트트랙 코치 폭행사건이 터졌다. 충격적이었다. 폭행당사자는 피해 선수를 오래 지도해온 조재범 국가대표 코치였다. 그리고 가해자 2심 판결을 앞두고 심석희 선수는 매우 큰 용기를 내어 성폭행 피해 사실도 추가로 고소했다.

앞선 폭행 사건도 충격이었지만 성폭행은 비교할 수 없는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그것도 심 선수가 미성년자였던 고교시절부터 자행되었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한다. 아직 어린 심 선수로서는 정말 어려웠을 용기를 낸 것이 장하다고 하기에 앞서 얼마나 힘들었을지에 대한 위로가 먼저일 것이다.

한국 쇼트트랙 여자 대표팀 심석희가 18일 오후(현지시간) 러시아 소치 해안클러스터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팔래스에서 열린 소치동계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3,000m 계주 결승에서 우승한 뒤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심 선수가 용기를 냈던 배경에는 조 코치가 이미 다른 선수들과의 합의를 끝내 이대로라면 집행유예로 끝날 것 같은 불안감이 작용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심 선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체육계에 만연한 카르텔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성폭행 사건은 어떻게든 언급하기가 조심스럽다. 특히 심 선수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만 한다. 아무리 피해자 편에서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자칫 2차 피해에 불과한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백 번 조심하고 천 번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조두순 사건을 피해자 이름으로 불렀던 경솔과 가해를 다시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우선 이번 사건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이름으로 정정해야 옳다. 그것이 어린 선수가 용기를 낸 동기를 헤아리는 최소한이다. 한 매체의 보도를 보자. “제2의 심석희 막아야...문체부 성폭력 전담팀 구성”이라는 제목이다. 가해자를 막아야지 피해자를 막는다는 것은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심석희 선수의 이름을 넣으려다 보니 의도와 다른 문장이 돼버린 것이다.

둘째는 피해자들에 대한 체육계 카르텔을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 선수가 이번에 용기를 냈던 것은 다른 피해자들의 합의서와 체육계의 탄원 등으로 처벌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물론 심 선수의 성폭행 추가 고소 후 3명 중 2명이 합의를 취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심 선수가 용기를 낸 것은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 의지가 컸겠지만 그와 함께 지도자들의 폭행에 대해 항의를 해봤자 소용없다는 체육계의 관행을 깨기 위한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지도자에 의한 폭행·성폭행 사건을 폭로해도 결국엔 피해자만 2차, 3차 피해를 추가로 얻게 되는 악순환을 깨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조재범 전 국가대표팀 코치 [연합뉴스 자료사진]

셋째로는 여성스포츠 지도자 구성에 대한 혁신이 필요하다. 소위 올림픽 효자 종목에서 여성팀이 전통적으로 강한 경우가 적지 않다. 쇼트트랙도 그중 하나다. 당연히 스타플레이어들도 많고, 그들 중 지도자 수업을 받은 이들 또한 많다. 그럼에도 감독과 코치는 남성 지도자들이 선임되었고, 성폭행이라는 독버섯을 키워왔다. 거기에는 빙상계의 파벌 문제도 얽혀 있다. 파벌과 성차별을 구조적으로 척결하지 않는 한 선수들의 피해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하지만 여자 종목의 지도자를 여성이 맡게 하는 더 근본적이고, 더 과감한 혁신이 필요하다. 쇼트트랙 성폭행 사건이 이번 하나일 리도 없고, 그렇지 않다는 익명의 전언도 존재한다. 물론 스타플레이어가 지도도 잘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맡겨본 일도 없지 않은가.

선수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남긴다면 올림픽에서 아무리 많은 금메달을 딴들 소용없는 일이다. 메달보다 사람이 먼저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체육계의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이번 사건이 마지막이 되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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