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이 휘청거리던 시절, 조선업의 메카 거제시에 취재하러 내려갔던 이승문 피디는 우연히 지도를 보고 거제 여상을 찾았고 거기서 '땐뽀걸즈'라는 동아리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동아리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에 빠져 카메라를 돌리기 시작한 지 어언 1년, 그렇게 다큐 <땐뽀걸즈>가 탄생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땐뽀걸즈> 포스터

'완뚜쓰리뽀, 완뚜쓰리뽀', 자이브와 차차차를 추는 열여덟 소녀들의 기록은 <KBS 스페셜>을 통해 방영되었고, 이후 영화 버전으로 개봉하여 2017 박찬욱 감독이 뽑은 올해의 독립 영화, 2017 푸른 미디어 청소년 부문 상, 그리고 2018년 54회 백상예술대상 TV교양부문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이어 8부작 드라마로 각색되어 12월 3일부터 방영되었다.

만년 9등급, 시험 시간엔 올5로 찍고 풀잠, 학교에서 요구하는 공부가 아니 학교생활이라는 게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이 아닌 학생들. 심지어 이미 학교 울타리 밖으로 나가버려 알바하다 잠자는 곳이 되어버린 아이. 부모라고 이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그런 아이들 앞에 이규호 선생님이 춤을 들고 나타났다. 밥을 먹여주고, 심지어 숙취 음료까지 챙겨주며 '춤바람'을 독려하는 선생님. 이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드라마 주인공들이 되어 찾아왔다.

조선소가 있는 거제로 돌아간 드라마

KBS 2TV 월화드라마 <땐뽀걸즈>

이승문 피디가 그리고 싶었던 조선소의 현실은 드라마 속 주인공 시은(박세완 분)이를 통해 그려진다. 시은이에겐 중학교 친구가 없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엄마는 끝내 아버지가 과로로 실족사하셨다지만, 회사에서는 자살이라며 산재처리를 해주지 않는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재판을 하며, 자신도 해고해버린 회사의 하청 물량팀으로 버티는 엄마. 영화 포스터로 방을 도배한 꿈 많은 소녀 시은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려워진 형편에 여상으로 진학했고 졸업 후 취업하라는 엄마와 갈등 중이다.

어떻게든 대학을 가겠다는 일념에 동아리 수상경력이 대학 지원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친한, 아니 여상에 편하게 다니기 위해 친한 척하는 친구들을 꼬드겨 댄스 스포츠 대회를 앞둔 땐뽀걸즈 동아리에 가입한다. 시은이의 친구들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시은이에게 넘어간 척 했지만, 한때 유도 유망주였으나 부상 후 '루저'가 되어버린 이예지(신도현 분)도, 자칭 여신이라지만 성형수술을 고민하며 학교 인기 동아리인 힙합반을 기웃대다 타이밍을 놓쳐버린 양나영(주해영 분)도 땐뽀가 좋아서 동아리에 든 건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 학교에서 방출될 위기에 놓인, 시은이 옆자리지만 말 한번 섞기 무서운 쎈캐 박혜진(이주영 분)이 선생님 손에 이끌려 합류했고, 이 동아리를 견제하기 위해 보내진 일진 꼬붕 김도연(이유미 분)과 심영지(김수현 분)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땐뽀반에 인원을 채우기 위해 합류됐다.

하필이면 왜 땐뽀걸즈?

KBS 2TV 월화드라마 <땐뽀걸즈>

최근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가 <SKY 캐슬>이듯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 관련 주된 이야기는 '입시'이다. 하지만 여전히 중학교에서 상당수의 학생들이 실업계로 진학하는 게 현실인 세상, <땐뽀걸즈>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빛을 잃은 아이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공영방송으로서 모처럼 ‘수신료’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얘들이 공부를 안 해서 못하는 거지,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수업 시간에 자는 건 관심이 없어서 자는 거지.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나 탈렌트가 오면 자겠습니까. 저는 춤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춤을 매개로 아이들이랑 친해졌어요. 댄스를 가르쳐서 선수 만들고 대학 보내는 거 전혀 생각 안 해요. 학교 다닐 때 아이들이 소속감을 가지고 즐겁게 다니기를 원합니다. -이규호 선생님

이규호 선생님의 이런 생각은 드라마 속 이규호 선생님의 행동으로 그래도 옮겨진다. 가정이 방치한, 학교도 더불어 방치한, 부서져버린 울타리를 넘나들던 아이들은 '땐뽀걸즈'를 통해 저마다의 문제와 씨름하며 각자의 성장통을 이겨나간다.

친구들까지 포섭하여 동아리에 들어왔지만 그 친구들을 한 번도 진짜 친구라 생각한 적이 없는 시은이. 자신이 가고 싶었던 인문계, 그리고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으로만 도는 자기중심적 세계에 빠져있던 시은이는 땐뽀반을 하면서 본의 아니게 자신의 가정사에 얽힌 사건에 끼어들며 혹독한 통과의례를 겪는다.

드라마에는 다큐와 다르게 남학생 캐릭터가 등장한다. 어린 시절 시은이와 함께 자랐던 아이, 하지만 이제는 훌쩍 자라 시은이를 연모하게 된 권승찬(장동윤 분). 하지만 승찬은 그저 로맨스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아니다. 시은이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한때는 시은이 아버지를 형이라 불렀던 조선소 인사담당 사무직, 권동석이 바로 승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선소 노조 쟁의와 관련하여 생긴 비극적 사건에 결부된 두 집안의 승찬과 시은, 이 두 사람은 정리해고가 난무하는 위기의 조선업이 낳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KBS 2TV 월화드라마 <땐뽀걸즈>

드라마는 그렇게 풋사랑조차 현실 속에 그려 넣고 그걸 성장통의 매개로 삼는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한때는 잘나가는 유망주였지만 사고를 핑계로 꿈에서 도망쳤던 예지의 속 깊이 숨겨놓은 슬픔도, 일찍이 울타리가 없었던 가정에서 자라 학교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으려는 혜진의 의지가지없는 고독도, 술만 마시는 아버지의, 어린 동생들과 힘겹게 안 되는 장사를 하는 어머니의 그늘 속에서 버티는 도연이와 영지의 무게도 땐뽀걸즈의 울타리 안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꿈이 이미 정해진 여상이라는 공간, 버거운 가정환경, 거제라는 꿈이 없어져 버린 듯한 외딴 도시, 그럼에도 그곳에서도 여전히 꿈을 꿀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 그 꿈은 누군가에겐 영화이고 무용이고 대학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겐 포기하지 않는 일상이며 생활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한 발자국 물러섬이라도, 누군가의 선택은 대학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취업이라도, 혹은 누군가에겐 그저 나쁜 길로 가지 않는 것이라도, 그 선택의 기로에서 그들 각자는 저마다의 성장통을 견뎌 내고 그 자리에 섰다고 드라마는 당당하게 '땐뽀걸즈'들을 정의 내린다. 빛나지 않아도 빛났던 청춘의 기록이다.

진짜 이 시대 아이들의 이야기. 각자가 짊어진 성장의 무게에 대해, 그리고 무겁지만 이를 기꺼이 짊어지고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땐뽀걸즈'와 이규호 선생님의 자리에 대해 <땐뽀걸즈>는 진짜배기 감동을 전한다. 결코 길지 않은 8부의 시간을 통해 다큐와는 또 다른 결의 감동을 전한다.

시청률은 2%를 오르내리며 고전했지만, 이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이라면 올 한 해 가장 기억에 남는 드라마로 이 드라마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듯싶다. 그리고 수신료의 가치를 실현해내기 위해 2019년에도 KBS가 가야 할 방향은 바로 <땐뽀걸즈>의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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