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비 맥과이어 아니고서는 스파이더맨을 생각할 수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토비는 거미줄을 뽑아 벽을 타는 스파이더맨이기엔 중후해져갔다. 결국 우리가 영화로 만난 유일한 스파이더맨 같았던 토비 맥과이어는 <스파이더맨> 1,2,3 트릴로지 시리즈를 남긴 채 앤드류 가필드의 <어메이징 시리즈>에 바통을 넘겼고, 다시 앤드류는 <아이언맨 2>에 수다쟁이 카메오 소년으로 등장한 톰 홀랜드에게 스파이더맨을 계승시켰다. 그 뒤로 참여수업 대신 벽을 타던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이언맨 아저씨의 지도 편달을 받아 어엿한 어벤져스 군단의 일원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던졌다.

그렇게 미소년 백인 배우들에 의해 계승되던 <스파이더맨>. 너드라 놀림 받기도 하고 서민형의 히어로였지만, 여전히 백인 미소년에게 승계되었던 스파이더맨의 전통을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이하 뉴 유니버스)>는 새롭게 열어젖힌다. 무엇보다 백인 미소년에 독점되던 젊은 청년 영웅은 '방사능 피폭된 거미'에게 물린다면 그 누구라도, 그리고 기꺼이 그 거미로부터 받은 힘을 사회를 위해 쓰기를 원한다면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다고 정의 내린다. 그가 흑인 소년이건 차원을 달리하는 곳의 스파이더맨 아저씨건, 스파이더 소녀건 느와르 버전 스파이더맨이건, 심지어 스파이더 로봇을 탄 어린이건 말이다. 그렇게 유일한 히어로였던 스파이더맨은 이제 새로운 세계에서 그 누구라도 가능한 ‘다차원의 히어로’로 거듭난다.

누구나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다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포스터

그동안 스파이더맨은 다른 시리즈, 다른 배우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영화 속 어떤 강력한 악당을 만나도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뉴 유니버스>는 바로 그런 히어로의 ‘영원불멸성’에 대한 허를 찌르며 시작한다.

경찰인 아버지, 간호사인 어머니를 둔 중산층 흑인 가정의 아들 마일스 모랄레스. 자신들이 살던 동네에 머물러서는 '성공’하기 힘들 거라 생각한 부모님은 우연히 그에게 떨어진, 기숙 사립학교의 입학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정들었던 동네, 정들었던 친구들과 떨어져 우리의 특목고 정도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학교로 전학 간 마일스. 당연히 그 학교에서 그는 모래알처럼 섞여들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은 공부보다는 아빠와 견원지간인 삼촌과 함께 그래피티(graffiti)를 즐기는 것이 더 좋은 청소년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가난한 백인 가정에서 부모님 없이 자란 너드(nerd) 피터 파커를 중산층의, 여전히 백인 중산층 사립학교에서는 '너드' 취급을 당하는 흑인 청소년 마일스를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그를 둘러싼 두 개의 세계- 한때는 삼촌과 함께 주먹도 좀 써봤지만 가정을 꾸리고 사회적 안정을 위해 경찰관이 된 아버지의 '신분 안정 혹은 상승'의 세계, 그런 아버지와는 불화하며 그래피티를 하며 삶을 즐기는 듯한 삼촌의 불안정적이지만 자유로운 세계. 밤에 학교를 빠져나와 삼촌과 지하철을 따라 간 으슥한 폐건물 벽에 자신의 미적 재능을 한껏 뽐내는 마일스는 삼촌의 세계에 경도되어 있다.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스틸 이미지

그런 마일스가 그곳에서 우연히 방사능 거미에 물리고, 뜻밖의 '스파이더'한 능력에 경악하며 다시 찾은 그곳에서 그는 다시 우연히 스파이더맨의 죽음을 목도한다. 거미줄이 만능인 양 힘겹더라도 결국은 악당을 물리치던 스파이더맨이었는데, 범죄 대부 킹핀의 공격 앞에 무기력하게 숨을 거두고 만다.

죽음을 맞이한 스파이더 맨과, 아직 스파이더한 능력을 조정도 못하고 그 능력으로 지구를 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마일스. 그런 그의 히어로의 길을 향한 유일한 연결고리는 죽어가는 스파이더맨의 부탁이었다. 하지만 부탁은 언감생심, 킹핀의 하수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은커녕 벽을 타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던 스파이더맨마저 그의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 상황, 그런 혼란스런 고민에 대해 믿고 의논할 삼촌은 행방이 묘연하고, 고민하는 그의 앞에 킹핀의 실험으로 흐트러뜨려진 평행우주 속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들이 등장한다.

학교에서 마주친 동급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른 차원에서 마일스처럼 가장 친한 친구였던 스파이더맨을 잃고 방황하던 스파이더 그웬. 1930년대 사설탐정으로 활약하던, 버버리 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쓴 스파이더 느와르. 아버지가 남기고 간 스파이더 로봇 'sp//dr'을 조종하는 미래에서 온 페니 파커. 돼지인지 스파이더맨인지 헷갈리는, 명랑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스파이더 햄. 거기에 마일스가 살던 곳과 똑같은 평행세계에서 온, 심지어 메리 제인과 결혼하고 이혼을 한 중년의 배 나온 루저가 되어가던 피터 B. 파커. 이들이 벌려진 세계의 틈 사이로 마일스의 세계로 와 '스파이더 군단'이 된다.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스틸 이미지

3D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뉴 유니버스>는 마일스의 현실에 삼촌의 세계인 그래피티한 영역을 더한다. 그리고 차원의 분열, 거기에 다시 다른 차원에서 온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만화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들을 더하는 방식을 2D의 만화적 공간을 옮겨온 듯한 효과를 통해 구현해낸다. 만화 속 효과음이 그래도 'BOOM'하는 글씨로 효과 음향과 함께 등장하는가 하면, 만화책처럼 화면을 여러 개의 다층적인 프레임으로 분할하여 다층세계에서 온 스파이더 군상을 조합해낸다.

거기에 종종 차원의 분열이 낳는 충격파 등의 다양한 특수 효과를 더하여 3D와 2D를 오가는 듯한, 그래서 현실적이지 않은 차원 이동의 상황과 캐릭터들의 현실감을 생생하게 살려낸다. 마블 코믹스의 만화를 보는 것인지,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인지 홀려서 두 시간 여를 보내고 나면 어느덧 마일스는 어엿한 스파이더맨이 되어 있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이제는 흑인 청소년이라도, 여성이라도, 중년의 아저씨라도, 아직 어린이라도, 심지어 동물이라도 그 누구라도 기꺼이 '책임감'을 가진다면 정의의 수호자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다는 명제를 가장 절묘하면서도 화려한 방식으로 구현해냈다.

여전한 성장 동화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스틸 이미지

하고 싶은 것만 하고팠던 소년 마일스는 거미에게 물려, 그리고 죽어가는 스파이더맨의 부탁으로 엉겁결에 영웅의 세계에 발을 들이민다. 하지만 영웅은커녕 자기 자신조차 가누지 못하는 이 소년은 마일스 삼촌의 정체, 그리고 뜻하지 않은 그의 죽음을 마주하고 다른 차원에서 온 '스파이더맨'들의 도움을 받게 된다. 마치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을 성장시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이언맨’처럼, 특히 다른 차원에서 온 또 한 명의 피터 스파이더맨의 지도 편달 아래 '스파이더맨'으로 성장해 나간다.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이렇게 우리가 지금껏 알아왔던 스파이더맨의 세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한다. 하지만 그 새로운 영상적 실험을 채워가는 건, 여전한 소년의 성장담이자 영웅의 자기정체성 수용서사이다. 영화 속 피터는 삼촌의 죽음을 통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교훈을 얻어가며, 스파이더맨이 되어 잠시 들떴던 자신을 정리하고 책임감 있는 영웅으로 거듭났다. 그렇듯 또 다른 차원에서 온 피터의 도움을 받아 흑인 소년 마일스가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을 수용하고, 삼촌의 죽음을 통해 정의로운 영웅의 자리를 기꺼이 맡는다.

이 방식은 그간 헐리우드 영화가 전통적으로 이어온 '청년 진보'와 '어른 보수'의 승계와 화해라는 양식을 그대로 답습한다. 소년 마일스에게 아빠는 그저 고루했던 어른의 세계를 대변하는 인물일 뿐이었다. 그런 아빠대신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삼촌, 심지어 그와 취미가 통했던 애런 삼촌의 세계에 경도되는 건 당연했다. 더구나 과중하면서도 숨 막히는 학교생활에 지친 마일스이기에.

하지만 영화는 마일스가 경도되었던 애런 삼촌의 실체를 뜻밖의 존재로 맞닥뜨리게 하면서, 그가 경도되었던 자유분방한 세계의 무책임함을 '회의'하도록 만든다. 반면, 그저 고루하고 가부장적이기만 했던 아버지. 심지어 스파이더맨이 싫다던 그 아버지가 그럼에도 위기의 상황에서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게 함으로써, 스파이더맨이 된다는 건 바로 그런 ‘아버지 세계로의 진입’이란 메시지를 담아낸다. 물론, 그저 아들을 성공으로만 밀쳐 넣었던 아버지가 마지막 아들의 그래피티를 경찰서 벽에 허용하는 너그러움을 보임으로써 두 세계의 '화해'도 놓치지 않는다.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스틸 이미지

화해는 비단 이 세계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다른 평행세계에서 온 피터 B파커는 일만을 위해 달려오다 자신을 잃어버렸던 과거와 '화해'했다. 죽은 스파이더맨을 대신한 마일스의 본의 아닌 교육과, 이 세계 붕괴과정에 대한 책임 있는 역할을 통해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일이 가치 있다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어른'의 성장을 그려내며 스파이더맨의 후일담까지 곁들인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의 정신과 교류하는 스파이던 로봇의 파괴로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의 세계와 이별을 할 수 있게 된 페니도,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도망쳤던 그웬도, 저 세계에서건 이 세계에서건 스파이더맨으로서 세상을 구하는 책임을 다하는 가운데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하고 성장한다. 각자 도망쳤던 자기 삶이 던져준 숙제를 성공적으로 해내며 저마다의 성장을 이루어낸다. 거기에 킹핀이 분열시킨 차원 덕분에 외로운 영웅의 과중한 책임감 대신 동지애를 선사하며, 스파이더맨 어벤져스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만화책을 보는 듯했다가, 들썩이는 음향에 현란한 시각적 효과를 곁들여 마치 한 편의 실험적인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했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하지만 이 화려한 볼거리의 중심에는 지금까지 모든 마블의 영화에서 변함없이 유지되어왔던 고전적인 영웅담의 서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애니메이션이든, 지구의 재벌 철 인간이든, 유전자 변형을 이룬 괴물이든, 몇십 년 동결된 살인 병기든, 심지어 외계에서 온 신화 속 인물이거나 다차원을 오가는 신비로운 인물이건. 마치 그 모든 영화에 카메로로 등장했던 대부 스탠리처럼 다른 소재 그럼에도 동일한 영웅 신화의 변주, 그 통일성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도 굳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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