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이, 자주 만들어지기에 자칫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에서 배경을 빌려온 사극은 작가에게나 연출자에게나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이미 처음과 과정과 끝이 정해져 있는 코스를 따라가면서도 그 안에서 시청자들의 흥미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요소들을 만들어 가야 하는, 재현과 창조의 아슬아슬한 경계점을 능숙하게 넘나들어야 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이런 외줄타기를 하면서 웬만한 이야기는 모두 3~4개월의 시간동안 풀어놓아야 하는, 호흡이 긴 마라톤 같은 긴 여정이기에 도중에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균형을 잡으며 페이스를 조절해야 합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에요.
동이는 최근 제작된 다른 어떤 사극보다, 혹은 이병훈 PD의 전작들보다 역사적 배경과 인물들이 익숙하고 잘 알려진 숙종 시대의 궁중 이야기에서 출발합니다. 역시 유명하긴 하지만 그 뿌리를 의문투성이의 자료, 화랑세기가 그리고 있는 미실이란 새로운 인물에 두고 있는 선덕여왕이나, 추노꾼이라는 낯선 이들의 저잣거리 속 삶을 그려낸 추노 같은 히트작의 배경은 시청자들이 매번 방송이 끝날 때마다 역사적 사실을 비교하며 찾아봐야 할 정도로 몹시나 새롭고 낯설었습니다. 실록에 몇 줄의 기술 외에는 주인공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대장금, 정조의 성장을 그렸던 이산과 비교해 보아도 인현왕후와 장희빈, 숙종이 등장하는 동이의 세상은 훨씬 더 친숙하죠. 비록 그 초점이 예전에 언급되지 않았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에게 맞추어져 있다고는 해도 동이는 재해석의 여지가 몹시도 적은 곳에서 출발했어요.
그런데 과감하게, 혹은 무모하게도 동이는 이들 친숙한 역사적 인물들에게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하고 재해석을 시도합니다. 허당기질이 충만한 로맨티스트 숙종, 총명하고 야심만만한 장희빈의 등장은 이 익숙한 이야기에 신선한 관전 포인트를 제시하며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어요. 예전에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주인공 이병훈 PD식 사극의 천하무적 주인공인 오지랖 넓은 사고뭉치 동이의 존재가 도리어 식상해보일 정도로 이 사극의 출발은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숙종 시대의 재발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이런 무리한 설정과 재해석은 역사적 사실에 자꾸만 발이 걸리고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민 출신의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 순정파 숙종은 조강지처인 인현왕후, 장희빈도 모두 사랑해야 하는 진정성이 의심스러운 바람둥이가 되어 버렸고, 몰락이 예정되어 있는 장희빈은 초반의 매혹을 모두 지워버린 채 결국 이전의 다른 장희빈들과 다를 바 없는 표독스럽고 탐욕에 가득하게 변해버린 채 맞이했고, 동이는 결국 마지막까지 숙종의 중전이 되지 못합니다. 끝까지 올곧고 선한 역할만을 감당했던 동이가 자신의 아들을 보위에 올리고자 움직이는 모습은 과연 장희빈과 무엇이 달랐을까요?
결국 애초의 무리한 설정에서 시작한 동이는 점점 더 역사적 사실과 드라마 속 내용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억지와 무리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캐릭터는 무너지고 이야기는 점점 산으로 가버리며 긴장과 흡입력을 떨어뜨렸죠.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데 갑자기 성격이 돌변하고, 똑같은 행동이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정당화되고, 상황은 점점 더 괴이하게 꼬여가기만 하니 초반의 애정과 습관으로 계속 보려 해도 정나미가 떨어질 수밖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