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보수적이던 남원 사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면서 국악의 저변 확대가 시작되었고 학교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국악반이 생기고 가야금이 들어오고 판소리를 배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보라 빛 꽃잔디 수북한 생활관 한 켠에서는 누구의 소리인지 모를 가야금 병창이나 판소리 한 대목이 머물러 있곤 했다. 비오는 날, 가야금 산조에 이끌려 빨간 우산을 들고 생활관 옆 느티나무 옆에 오랫동안 서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소리와 인연을 맺은 덕분인지 이후 내 귀에는 가야금 뜯는 소리나 판소리가 아련히 이어졌다. 광한루 옆 승사교를 건너 오른편 남원 국악원에서 들려오는 판소리는 명경(明鏡) 그 자체였다. 그리고 당시 남원에는 동편제의 대가로 남원을 지키며 후진을 양성해온 인간문화재 강도근(1917-1996) 선생이 계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빠르고 늦은 감은 있으나 그 즈음 국악에 입문한 선후배들은 국악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간혹 전국 명창대회 장원 명단에서 심심찮게 발견하곤 해서 저력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듯 인간문화재 명창이나 예비 명창들의 활동을 자연스럽게 접한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남원 광한루를 앞 마당삼아 뛰놀던 유년 시절의 추억이 얼마나 풍성한 문화적 풍토를 조성해주었는지 늘 감사하며 사는 대목이다.

그런데, 성숙한 전통문화의 토양에서 자라 문화적 소양도 제법 갖추었고 문화유산 전승 또는 계승 발전을 위한 프로그램도 다수 만들었으니 이만하면 문화적이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교만한 행태인지 최근에 크게 깨달았다.

지난 10월1일부터 5일까지 2010 전주세계소리축제가 전주 일원에서 개최되었다. 지난해 신종플루의 여파로 지난해 행사다운 행사를 치르지 못한 <전주세계소리축제>에 대한 기대치도 높았고 올해로 10년을 맞이하는 소리축제를 도민과 함께 축하하기 위해 전북원음방송에서는 소리축제 프로그램 가운데 <조상현 명창의 ‘판소리란 무엇인가’>를 녹음방송하기로 했다.

▲ 조상현 명창. (제공: 2010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상현 명창은 그 이름에서부터 무게감이 전해오는 판소리의 거목이다. 폭포수 같은 성음과 사통팔달의 연기력으로 판소리 저변확대에 크게 기여해온 분인데 1976년 제2회 전두대사습놀이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전주와 인연이 깊다. 1회 대회는 도지사 상이었으니 판소리부문에서는 우리나라 최로의 대사습놀이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 그리고 2010년 10월 세계소리축제에서 소리를 하기 위해 전주에 왔으니 34년만의 방문이다. 찾아오는 이나 맞이하는 이나 반가움이 앞선다.

10월2일 토요일 저녁 무렵, 전주한옥마을에 불 빛이 새어나오고 빗줄기를 헤치며 삼삼오오 한옥생활체험관을 찾는다. 대청마루에는 찻상이 놓이고 다례교육원 ‘설예원’ 회원들이 정성스럽게 차를 준비한다. 차와 다과를 나누며 정담 무르익으니 이게 바로 축제가 아닐까. 조상현 명창이 대청마루에 오르자 우레같은 박수로 맞이한다. 대청마루는 관객들로 발디딜틈 없다. 모두 정좌하고 명창의 강의에 귀를 기울인다.

▲ <조상현 명창의 ‘판소리란 무엇인가?’> 강연 모습. (제공: 2010 전주세계소리축제)
전주와의 인연으로 말문을 연 명창은 전라북도가 판소리의 못자리로서 얼마나 유서깊은 고장인지 전주세계소리축제의 당위성을 각인시킨다. 단체장의 의지에 따라 흥망성쇠하는 각종 축제의 예를 들어 전주세계소리축제가 10년 성상을 맞이한 것에 대한 축하와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잠시 후 강연이 열기를 띠면서 우리가 판소리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그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양음악에 대한 기본 상식에도 미치지 못한 부족함을 사례별로 짚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명창의 일침이 따끔하다.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것과 잘 아는 것은 다릅니다. 물론 좋아하고 더불어 잘 안다면 실로 금상첨화겠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좋아하는 것을 잘 안다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주는 판소리를 좋아하는 고장이지, 잘 아는 고장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강의는 판소리의 기본에서부터 판소리 감상법으로 이어진다. 좋은 소리와 그릇된 소리를 직접 비교하며 열강하는 명창의 판소리 한 대목 한 대목에 청중들은 크게 감동한다. 서서히 빠져드는 판소리의 세계, 아 이게 판소리란 것이구나. 명창의 강의는 구성진 소리와 폐부에 꼭꼭 와 닿는 명언으로 계속된다.

“잘 하면 소리요, 못하면 노래입니다.”
판소리라고 해서 전부 소리가 아니고 일부는 그냥 흘러가는 유행가와 다름없다는 말.

“소리는 시간 자랑이 아니고 예술 자랑입니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부른다고 해서 모두 ‘진짜 소리’는 아니라는 뜻. 소리의 이면을 제대로 보여주는 소리가 우리가 말하는 소리라고 강조.

저녁 8시부터 시작된 강의는 9시가 넘고 10시가 다 되도록 끝날 줄 모른다. 한옥 대청마루에 앉아 엉덩이도 아프고 다리도 저릴 법 하건만 그 사이 화장실 가는 사람도 없다. 경청하는 자세가 설법듣는 것 만큼 진지하고 숙연하다.

밤이 깊어가면서 비가 거세게 내리쳤다. 마당의 차양도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풀썩 주저앉는다. 방문도 활짝 열어 제끼고 마이크도 없이 강의하던 명창의 목소리가 빗소리보다 더 크다. 비를 음향효과 삼아 내기 힘들다는 귀곡성(鬼哭聲)까지 열연하는 조상현 명창. 관객들은 몸을 움츠리며 소리의 매력에 빠져든다. 평생 소리와 함께 살아온 예인의 열정이 판소리의 못자리 전주를 찾은 소리축제 관람객을 매료시킨다. 명창은 다음과 같은 말로 긴 강연을 마감한다.

“옛말에 ‘문악지정 관무지덕(聞樂知政 觀舞知德)’이라 했습니다. 음악을 들어보면 그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고, 춤을 보면 그 덕을 알 수 있다는 말이지요. 소리의 진실, 그 이면을 볼 줄 알아야 ‘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한옥 대청마루는 감동의 도가니다. 멀리 뉴욕에서부터 가까이 광주에서 <조상현 명창의 판소리란 무엇인가>를 듣기 위해 한옥생활체험관을 찾았다는 청중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른다. 이윽고 비가 그치고 앞 마당에 막걸리 잔치가 펼쳐졌다. 가을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 2010 전주세계소리축제 참석자들의 모습. (제공: 2010 전주세계소리축제)
기술감독이 건네준 테입의 녹음은 144분, 이것을 방송시간에 맞춰 90분으로 편집하는 과정이 남아있다. 판소리가 무엇인지, 판소리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알 수 있다면 방송의 의미가 충분하리라 믿으며 10월5일 오전9시30분부터 송출했다. 편집하는 동안에도 명창은 큰 소리로 나를 꾸짖었다.

“좋아하는 것과 아는 것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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