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장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저의 이번 걸음이 금단의 벽을 허물고 민족의 고통을 해소하고, 고통을 넘어서서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는 그런 계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2차 남북정상회담 모습.
2007년 10월 2일 9시 5분.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린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발로 걸어서 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 날 행사를 위해 특별히 노란색으로 표시된 바로 그 ‘금단의 선’을 넘어선 역사적인 장면은 반세기 넘도록 민족을 둘로 갈라놓은 저 보이지 않는 높은 벽의 한 귀퉁이를 허물어내는 또 하나의 ‘상징’이 됐다. 2차 남북정상회담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다음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 두 달 전에 터져 나온 남북정상회담 소식에 전 세계인의 눈과 귀는 온통 한반도로 쏠렸다. 회담 타결부터 합의문 발표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준비된 특종’이었다. 비록 정상회담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고 취재하지는 못했지만,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기자로 살아가는 내게 텔레비전으로 전해지는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한 편 드라마는 지금까지도 말 못 할 긴장감과 뿌듯함을 떠올리게 해준다.

남북정상회담을 현장에서 지켜본 이들이 각자의 시각으로 보고 기록한 정상회담의 겉과 속이 한 권 책으로 꾸며진 것은 무려 2년이란 시간이 지난 뒤였고, 그 사이 정상회담의 주역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또 다시 1년이 더 흘렀다. 당시의 기록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며 기억을 더듬다 보니, 남북 정상의 만남이라는 사안의 무게와 복잡 미묘한 남북 관계만큼이나 극적인 순간이 많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2007년 8월 7일 중앙일보 1면에 실린 “8․28 평양 북핵 정상회담설” 기사는 이튿날 청와대의 긴급 기자회견을 불렀다. 회담 날짜(8월28일)와 장소(평양)까지 정확하게 맞힌 이 기사는 결국 언론사에겐 특종이었지만, 회담엔 자칫 악재가 될 뻔했다. 이후 뜻하지 않은 북한의 수해로 회담 일정이 한 차례 연기되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때는 실현되지 않았던 노 전 대통령의 평양 시내 카퍼레이드는 “그 자체로 남북 간의 신뢰와 화해의 진전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공식 환영 행사가 인민문화궁전에서 4․25 문화회관으로 급작스럽게 바뀌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환영식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등 돌발 상황이 연이어 발생했다. 회담 첫날 만찬장에서 노 전 대통령이 느닷없이 술잔을 들고 연설단상에 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건배를 제의한 일이나 이튿날 첫 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노 전 대통령에게 평양에 하루 더 머물라는 깜짝 제안을 한 것도 대단한 화젯거리였다.

하지만, 남북 정상이 합의한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공동선언’ 만큼 파격적이고도 극적인 사건은 없었다. ▲한반도 종전 선언 추진,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 추진 ▲남북 국방관 회담 내달 평양 개최 ▲남북정상회담 수시 개최 ▲남북 총리 회담 내달 서울 개최 ▲서해 평화협력 특별지대 설치 ▲남북조선협력단지 설치 ▲백두산 관광 합의와 백두산-서울 직항로 개설. 항목 하나하나가 전부 톱기사 감이라 할 정도로 예상을 뛰어넘는 구체적이고도 진전된 선언문은 내외신 기자들은 물론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국내 149곳, 외신 90곳 등 239개 언론사에서 기자 1377명이 서울 프레스센터에 등록하고 취재활동을 했다. 그만큼 한반도의 상황은 뜨거운 감자였다. 당시 취재단에 참가한 기자들과 청와대 보좌진의 후일담을 읽다 보면 정상회담이 성사되는 과정부터 기자단을 꾸린 일하며 회담장 안팎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 그리고 차마 기사로 써낼 수 없었던 뒷얘기들까지 이런저런 사연이 얼마나 많았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남과 북의 대화는 50년 세월의 벽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고통스러운 현실 인식의 자리인 동시에 그 강고한 벽 너머에 있는 서로의 존재에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미래 지향적 소통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지난 2년 간 남북 관계는 이런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정도로 또다시 높아진 불신의 벽에 가로막혔지만, 3년 전 선언문에 명시된 남북 합의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또, 선언문의 의미와 가치 역시 1차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로 나온 6․15 공동선언과 더불어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10․4 선언이 나온 뒤로 이렇다 할 성과 없이 3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남북정상회담이란 각본 없는 드라마를 책으로 다시 만나는 감회는 새롭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록’에 인색한 우리 풍토를 생각할 때, 일시적으로 꾸려진 취재단이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공동의 이름으로 기록한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더욱이 1차 정상회담에 관한 공식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안타까운 사정 때문에라도 정상회담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담은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물인 이 책의 소중함은 각별하다. 극도로 제한된 여건 속에서 북녘 땅의 속살을 제대로 들여다보기란 그때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일이지만, 땀과 눈물, 초조함과 흥분이 다각도로 교차하는 증언들은 어느 필자의 말처럼 남북 관계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는 밑거름이자 더 나은 세 번째 정상회담을 낳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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