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 실존에 상대되는 말로, 어떤 존재에 관해 ‘그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성질.

국어사전에 나온 본질의 정의입니다. 명확히 이해되는 깔끔한 설명은 아닙니다만, 여기서 핵심은 ‘그 무엇’입니다. 한 마디로 대상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바로 대상의 본질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다’라는 명제를 살펴보죠. 여기서 사람의 특징을 설명한 ‘그 무엇’은 바로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람의 본질은 ‘사회적인 동물’이 됩니다. 그런데 본질은 단순히 대상을 정의할 뿐만 아니라, 규정하기도 하는데요. 사람의 본질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면, 사회적이지 않은 동물은 인간이 아닙니다. 때문에 인간의 본질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 되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본질이 이미 우리의 성격을 규정해버렸기 때문이죠.

그런데 본질의 정의를 살펴보면, 실존에 상대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존은 무엇일까요. 실존은 본질이 대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에 반발해서 나온 개념입니다. 사전에서 실존을 찾아보면 ‘사물의 본질이 아닌, 그 사물이 존재하는 그 자체’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 자체’입니다. 본질은 사람의 특성을 ‘그 무엇’으로 정의하는 반면, 실존은 사람이 존재하는 ‘그 자체’가 곧 사람의 특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뭐가 다르냐고요? 일단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본질은 ‘사람은 어떠어떠 해야 한다’라고 사람을 규정합니다. 본질이 맨 앞에 있고, 실존하는 사람은 그 다음입니다. 하지만 실존은 존재하는 그 자체입니다. 때문에 실존이 맨 앞에 있고, 사람의 특성을 규정하는 본질은 그 다음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라고 이야기 한 것이죠. 그래도 본질과 실존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요? 그렇다면 김경욱의 새로운 장편소설, <동화처럼>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름 사랑에 관해선 전문가입니다. 때문에 술 한 잔 걸치면, 누구나 사랑에 관한 개똥철학을 늘어놓습니다. “야 사랑은 결국 현실이야” “야 사랑은 불변하는 가치야” “야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등등. 하나 같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랑은 어떠어떠하다’라는 사랑의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저마다 늘어놓는 사랑의 본질이 너무나 제각각인지라, 때로 상충하는 본질이 도출되기도 합니다. 이런 식이죠. 얼마 전 실연의 아픔을 겪은 사람은 사랑의 본질을 ‘사랑은 소멸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테고, 지금 막 핑크빛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은 ‘사랑은 변치 않는 것’이라고 규정하겠죠. 그렇다면 어떤 것이 맞는 것일까요.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면 사랑은 변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20년 넘게 플라토닉 사랑을 이어오다, 결국 결혼에 성공한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러브스토리를 보면, 사랑은 변치 않는 게 맞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동화처럼>은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답해주는 소설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도, 변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사랑은 사랑 그 자체일 뿐이야.’ 김경욱은 <동화처럼>에서 사랑의 실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어떠어떠하더란 질문은 집어치우고, 그냥 사랑을 하든지 말든지 하라는 겁니다. 사랑이 변하네, 안 변하네 논쟁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본질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라면, 김경욱은 사랑을 실존적으로 접근합니다. 작가의 말을 한 번 들어보시죠.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살아가거나 죽어가거나 둘 중 하나이듯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하지 않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뿐.” (작가의 말 중)

그래서일까요. 김경욱은 <동화처럼>에서 한 커플이 나누는 사랑을 매우 건조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드라마적 요소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이야기입니다. 말 수가 적은 평범한 남자와 눈물이 많은 평범한 여자가 서로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 다시 갈등하는 게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쉽게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김경욱의 필력이 워낙 뛰어나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실존하는 사랑 ‘그 자체’를 다큐멘터리 작가의 시선으로 세심하게 묘사한 부분이 소설의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화처럼>은 독자의 훔쳐보기 욕망을 충족시켜줍니다. 마치 트루먼쇼처럼, 실제 존재하는 커플의 행동을 몰래 카메라로 찍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제목은 <동화처럼>입니다. 동화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때문에 동화의 구조는 현실보다 단순하고 간명합니다. 보통의 왕자들은 단 한 번의 키스만으로 잠자는 공주를 깨우고 오래오래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동화 속 사랑은 종종 ‘사랑은 영원하다’ 따위의 교훈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사랑에 관해 본질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때문에 어려서부터 동화를 읽은 대부분의 성인들은 사랑에 관해 본질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그런데 김경욱은 작가의 말에서 다시 한 번 동화 속 러브스토리를 경계합니다. “진실의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라는 말이 사랑만큼 잘 맞아떨어지기도 쉽지 않으리라.” 그렇습니다. 소설 <동화처럼>에서 동화는 사랑의 실존을 명확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일종의 대조군입니다. 즉, 동화에 나타나는 낭만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며, 동화가 이야기하는 사랑의 본질이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의 실존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작가 김경욱은 줌렌즈를 통해 사랑의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까요. 동화 속 왕자님과 공주님처럼 ‘오래 오래 잘 살았습니다’란 한 문장으로 간단히 정리되면 좋으련만, 현실 속 사랑은 시종일관 삐걱거립니다. 김경욱의 고성능 줌렌즈는 바로 현실 속에서 우리가 겪는 사랑의 삐걱거림을 향하고 있습니다. 물론 <동화처럼>은 일일연속극처럼 사랑이 삐걱거리는 이유가 시어머니의 반대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드라마의 상황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죠. 하지만 <동화처럼>의 상황은 매우 사실적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처럼 사랑하지 못 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많습니다. 남녀의 소통 방식이 달라서일 수도, 또 평생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일 수도, 가치관이 달라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화처럼>이 제시하는 가장 인상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모여 사는 게 아니라 네 사람이 모여 사는 거라고. 신랑과 신부, 그리고 각자의 마음속 아이 네 개의 다른 별에서 살던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사는 거라고.” (P.292)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우리 내면에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아이가 숨어있습니다. 미성숙한 아이는 때로 성숙한 자아를 지배하기도 합니다. 미성숙한 아이는 쉽게 상처받고 상처를 줍니다. 그런데 남녀가 사랑해서 함께 살다보면, 내면의 미성숙한 아이가 종종 불쑥 불쑥 튀어나옵니다. 그 아이는 때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이 같은 투정과 분노를 표출해 상처를 주고, 상대방의 사소한 행동에 크게 상처받고 슬퍼합니다. 내면의 미성숙한 자아가 이처럼 서로에게 쉽게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면, 우리가 나누는 사랑은 한 없이 삐걱거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즉,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일도 벅찬데, 네 사람이 한 공간에서 티격태격하며 지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은 쉽지 않은 겁니다. 겉으로는 ‘아내가 매일 밤늦게 들어와서’라며 화내고 욕하지만, 실은 내면에 있는 아이가 자기만 봐주길 바라는 유아적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사랑이 삐걱거리는 것은 상대방 때문이 아닌, 미성숙한 아이를 내면에 담고 있는 자기 자신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구리 왕자는 고통을 통해 성장하지만 공주는 어떤가요? 은혜를 베푼 개구리를 징그럽다며 벽에 패대기쳐버리죠. 공주의 미성숙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에요. 개구리가 멋진 왕자가 되자 결혼하지만 공주 자신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결코 행복을 얻을 수 없어요. 개구리도 왕자의 일부이기 때문이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만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얻을 수 있어요.
장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의사의 분석에 따르면 문제는 개구리도, 개구리 냄새도, 시아버지도 남자도 아니었다.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P.282-283)

결국 ‘사랑은 원래 어떠어떠하다’는 본질은 의미가 없습니다. 설령 사랑의 본질이 존재한 다해도, 사랑을 행하는 사람의 본질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는다면 사랑의 본질은 효력이 없습니다. 대신 사랑의 실존이 있습니다. 내면에 미성숙한 아이를 가지고 있는 성인 남녀들이 만나서 서로 감정을 공유하며 행복해하고, 때론 힘들어 하는 행위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위 그 자체가 사랑이 됩니다. 사랑이 변하냐, 안 변하냐를 따지기보다 내 안의 미성숙한 아이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는 것이 보다 사랑을 공고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내 안의 미성숙한 자아가 상대방에게 상처주지 않고, 상대방의 행동에 상처받지 않을 때, 사랑이 변하지 않을 가능성은 높아질 수 있습니다. 내 안의 아이를 끊임없는 대화와 교육으로 성숙하게 성장시켜 나갈 때, 비로소 동화 속 사랑의 본질은 현실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실존하는 개인들이 만들어가는 결과물입니다.

책, 영화, 여행을 통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는 부지런한 블로거, ‘알스카토’입니다. (http://blog.naver.com/haine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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