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1월 25일, 함포 25문과 어뢰 발사관 4문을 장착한 6682톤급 미국 전함 메인 호가 쿠바 수도 아바나에 닻을 내렸다. 당시 쿠바를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은 미국에게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스페인의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쿠바 지배방식이 마뜩찮았던 데다, 자국 해안에서 90마일밖에 안 되는 곳에서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리는 적을 마주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더욱이 쿠바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의 안전도 걱정이었다. 메인 호의 임무는 간단했다. 쿠바 내 자국민 보호를 위해 일종의 보초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승인이 없는 한 발포는 물론 어떤 종류의 적대행위도 엄격하게 금지돼 있었다. 메인 호에 탑승한 해군 병사 250여 명에게 그 임무는 사실상 공인된 휴가나 다름없었다. 눈부신 카리브의 바다 위로 찬란하게 내리쬐는 밝은 태양 아래 병사들은 3주 동안의 달콤한 휴식을 즐겼다. 무료함과 여유로움이 잔잔한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군사 활동의 흔적은커녕 무력 충돌 개연성도 전혀 없어 보였다. 뭔가 큰 일이 터질 거라 기대했던 기자들도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 목가적인 풍경은 뜻밖의 사건으로 일순간 악몽이 돼버렸다. 1898년 2월 15일, 미 해군 소속 전함 메인 호가 폭발해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이 전원 사망했다. 미국의 보복을 두려워한 스페인은 곧바로 자국 전함 비스카야 호를 보내 뉴욕 항에 정박시키고 조기를 내걸었다. 사고 원인을 두고 기름을 끼얹으며 도발을 시작한 것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신문 <저널>이었다. 메인 호가 폭발한지 이틀 뒤 <저널>은 “에스파냐의 배신과 적의에 대한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있다며 “미국 병사들이 의도적으로 희생을 당했다.”고 썼다. 심지어 “‘그놈의 배가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들은 소리를 질렀다. ‘우리 면전에 버티고 있으면서 우리를 모욕했으니 그래도 싸다.’”는 스페인 사람들의 발언까지 정확하게 옮겨 적었다. <저널>의 기사가 나온 이후 한동안 “메인 호를 기억하자”는 구호가 미국 전역을 뒤덮었다. <저널>의 헤드라인은 연일 거침이 없었다. <순양함 메인 호 폭발하다> <군함 메인 호, 적의 비밀 병기에 두 조각 나다> <온 나라가 전쟁의 열기로 몸서리치다> <에스파냐의 배신으로 인해 파선된 메인 호는 현재 어떤 모습으로 아바나 만에 누워 있는가> <아바나 주민, 메인 호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를 모독하다> <메인 호는 사실상 배신에 의해 파괴되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저널>의 기사는 모조리 날조된 것이었다. 1898년 3월 28일, 해군 사문회는 메인 호의 폭발이 우연한 사고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메인 호의 파괴는 (함선 외부에 있던) 대잠수함용 수뢰폭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전방 탄약고 가운데 두 개 또는 그 이상이 부분적으로 폭발한 원인으로 보인다.”면서 “그 수뢰가 과연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으며, 과연 누가 그곳에 두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고 밝힌 것이다. 그런데도 <저널>은 사과도, 변명도, 시인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해군 사문회 조사 결과를 실제 발표보다 두 주나 전에 발표하면서 “메인 호 폭발에 에스파냐 정부 관료의 관여 확증 발견” 따위의 속보이는 거짓말을 일삼았고, 해군 사문회의 조사 결과가 나오자 이를 비웃으며 해군이 진짜 증거를 숨긴다고 비난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물론 역사학자들도 대부분 해군 사문회의 결론을 신빙성이 큰 것으로 받아들였다. <저널>을 무기로 허스트가 벌인 전쟁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에스파냐와의 전쟁, 다른 하나는 경쟁상대인 퓰리처의 <월드>를 물리치는 것이었다. 허스트의 전기 작가 스완버그는 이렇게 평가했다. “메인 호의 사고에 관한 허스트의 보도는 지금까지도 인정사정없고 심지어 진실조차도 없는 신문의 주전론 가운데서도 그야말로 초절정으로 평가된다.”

천안함은 메인 호(?) <조선일보>는 <뉴욕 저널>(?)이라는 이 책의 선전 문구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대목은 여러 면에서 기시감(旣視感)을 불러온다. 메인 호 폭발 원인을 놓고 사상 최대의 거짓말을 일삼은 것은 허스트의 <저널>이었고, 미국의 수많은 언론은 <저널>의 논조를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심지어 <월드>의 퓰리처조차도 자신의 언론 원칙을 포기한 채 그 날조된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어 주전론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이 내용은 데니스 브라이언이 쓴 평전 <퓰리처>에도 자세히 나온다.). 미국 언론은 한 덩어리로 똘똘 뭉쳐 스페인을 무자비하게 공격해댔다. 이 과정에서 아무런 반대도, 통제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 책이 차례에서 보여주듯 날조를 생산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거짓말하기, 또 하나는 진실 숨기기다. 날조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이 두 가지는 톱니바퀴처럼 긴밀하게 맞물려 작동한다. 누가 거짓말을 했는가. 누가 진실을 숨기는가. 사실이 명명백백 밝혀지지 않는 한 그걸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누구나 거짓이 아닌 진실, 감춰지지 않는 진실을 원한다. 이 책에 열거된 수많은 일화가 보여주듯 날조의 생산은 대부분 정치적인 목적이나 동기와 결부된다. 실수는 차라리 애교로 봐줄 수도 있으리라. 목적성을 띤 조작과 날조는 악질적인 면으로 따지면 더한 것이 없는 까닭에 그 사회를 지탱하던 신뢰 구조를 무너뜨리고 치유할 수 없이 병들게 한다. 앞서 언급한 기시감(旣視感)이 기우(杞憂)를 넘어선 섬뜩함을 주는 까닭이다. 진실은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한 건 있다. 육하원칙(5W1H)에도 맞지 않는 조사 결과를 도대체, 누가,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언론의 역사를 읽다보면 수많은 조작과 날조의 사례들을 만나게 된다. 이 책이 보여주는 초창기 미국 언론의 거짓말 가운데는 비교적 생소한 이야기도 많지만, 여섯 살짜리 마약 중독자 이야기를 지어내 퓰리처상까지 받은 <뉴욕타임스>의 재닛 쿡 사건(이 내용은 벤 브래들리의 자서전 <워싱턴 포스트 만들기>에 소상하게 나온다.)부터 비교적 최근의 경우인 <뉴 리퍼블릭>의 스티븐 글래스 사건(이 이야기는 <섀터드 글래스>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과 <뉴욕타임스>의 제이슨 블레어 사건에 이르기까지 기사를 소설처럼 작문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무엇이 진실인가를 탐색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엇이 진실이 아닌가를 가려내는 일이 더 중요해진 게 아닌가 하는 씁쓸함을 지울 길 없다. 그 자신이 훌륭한 작문가였던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다. “진실이 고통스러운 까닭은 십중팔구 부련하고 종종 지루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뭔가 더 재미있고, 더 마음을 달래주는 것을 찾게 마련이다.” 그래서 언론이 생산하는 역사의 초안(草案)은 끊임없이 그 진실성을 공개적으로 검증받아야 한다. 권력은 침묵을 가능케 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침묵을 가능케 한다. 하여 특정한 정치세력과 결탁해 그들의 정치적 목적에 복무하는 언론은 그 언론을 비판하며 진실을 찾아가는 또 다른 언론에 의해, 진실에 목마른 국민에 의해 처절하게 발가벗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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