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70억 원 뇌물 혐의로 법정 구속됐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판결과 판박이로 닮은 결과였다.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 석방. 신동빈 회장을 풀어준 법원의 선처 이유는 이재용 부회장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대통령의 강요에 의해 뇌물을 준 피해자라는 것이다.

법원은 물론 뇌물에 대해서 무죄를 판단한 것은 아니다. 1심에 이어 항소심 재판부 역시 K스포츠재단에 기부한 70억 원을 뇌물로 보고 유죄를 인정했다. 그러나 풀어주었다. 마치 이재용 항소심 판결을 베끼기라도 한 듯 ‘수동적 뇌물’이라는 기형의 논리가 판결을 지배했다.

KBS 뉴스9 보도화면 갈무리

“재벌이라는 이유로 피고인에게 너그러워서도 안 된다”고 했지만 “대통령 강요로 인해 지원금을 건넨 피해자에게 뇌물 공여 책임을 엄히 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논리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와 다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재벌에게 센 주먹을 날리지 못하는 법원의 친재벌 유전자는 여전했다. 법원의 이런 식의 판결은 앞으로 누구든 뇌물공여자를 엄히 처벌하지 못하도록 판례를 더 남기는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수동적이더라도 뇌물 공여죄에 대한 처벌을 엄중히 해 재벌들에게 정경유착의 두려움을 심어주는 계기로 삼았어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재용 부회장이 풀려날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언론들도 잠잠하다. 핑곗거리는 있다. 같은 날 법원은 “다스는 MB 것”이라는 판결을 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15년을 선고했다. 대부분의 방송 뉴스도 이 소식을 전하기에 숨이 가빠 보였다. 게다가 태풍 콩레이까지 한반도 목전에 다다르고 있어 신동빈 집행유예 말고도 보도할 거리는 차고 넘친 상황인 것은 맞다.

JTBC 뉴스룸조차 법원의 봐주기 판결에 대한 비판적 입장 없이 단순히 선고 내용만 전하고 말 정도였다. 방송사 뉴스로는 KBS가 유일하게 비판을 담은 뉴스를 내보내기는 했으나 거의 단신처럼 다룬 것에는 다르지 않다. 당연히 네이버 등 포털에서도 비판적 기사는 메인에서 찾아볼 수 없다. 법원 판결의 문제점을 지적한 기사가 워낙 적기도 했지만 포털이 선택한 기사는 “열심히 일하겠다”는 신동빈 회장의 소감을 전한 것이었다.

JTBC 뉴스룸 보도화면 갈무리

그 기사는 내용보다는 필요 이상으로 사이즈를 키운 신동빈 회장의 석방 사진들이 거의 전부였다. 한겨레신문만이 거의 유일하게 ‘재벌 봐주기 3·5법칙’을 거론하며 강한 비판을 내놓았을 뿐이다. 재벌 재판 ‘3·5법칙’은 법원이 재벌 총수에게 1심에서는 실형을 선고하지만 2심에서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풀어주는 패턴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 오히려 재벌 총수들에게 몇 개월의 징역을 살게 한 것이 기적이라고 봐야 할 지경이다. 재벌 총수의 범죄에 대해서 정의는 오직 1심 재판에서만 유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신동빈 회장에 대한 1심 판결은 “대통령 요구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선처한다면 어떤 기업이든 뇌물 공여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뇌물죄의 취지에 부합한다.

이처럼 상식과 국민감정을 외면한 법원의 잇따른 재벌 봐주기 판결에 대한 비판은 커질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으로 법원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도 재벌에게 솜방망이를 든 판결은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국민 여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안하무인인지 모를 일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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