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세상은 변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2년이 흘렀습니다. 노무현 시대를 풍미하던 ‘정의(Justice)'의 주인공은 모두 교체됐습니다. 대신 노무현 시대 시절, 바닥을 뒹굴던 조연들이 새롭게 떠올랐습니다. 대북 포용 정책은 물러터지다는 비판 아래 하차했고, 대신 호전적인 강경책이 단호하단 강점을 얻고 올라섰습니다. 노무현 시대에 정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종부세는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악으로 여겨졌으며, 감세를 통한 경기 활성화가 새로운 주인공으로 떠올랐습니다. 급기야 새로운 시대는 ‘행정수도 이전 반대’를 들고 나와 이전 시대에 활동하던 정의의 흔적을 완전히 새로운 얼굴로 대체하려 했습니다.

적잖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누가 옳고 그른가는 그 다음 문제였습니다. 물론 조중동의 이념으로 무장한 강경 보수나 머리보다 몸이 앞서는 진보 운동가들에겐 이러한 변화가 아무렇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그들에겐 굳건한 신념이라는, 효과적인 멀미약이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저 같은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은 분명 축이 한 순간에 뒤바뀌는 한반도의 대전환이 무척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목부터 부담스러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인문서가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오르는, 비현실적인 사건을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요. 이 책의 1장에 실린 내용입니다.

‘민주사회에서의 삶은 옳고 그름, 정의와 부정에 관한 이견으로 가득하게 마련이다. (중략) 그렇다면 정의와 부정,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에 관해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는 영역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통과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P.44-45)

▲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저 김영사
이 책은 ‘네 코끼리의 코는 어디 갔니’같이, 알맹이는 없으면서 호기심만 자극하는 제목을 택한 것도, 그렇다고 소녀적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는 모던한 디자인의 표지를 택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매일 입에 풀칠하며, ‘어제 산 포도는 달던데, 복숭아는 왜 이렇게 안 달까’ 같은 형이하학적 생각의 극치 속에 살아가는 다수의 현대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것도 ‘정의’라는 무거운 단어를 사용해서 말이죠. 그건 어쩌면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결국 단 포도와 떫은 복숭아를 먹으면서도 막연히 ‘평등과 불평등’ ‘정의와 부정’같은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은 ‘정의’에 대해 이야기했던 과거 학자들의 의견, 그리고 실제 벌어졌던 다양한 논쟁들을 통해 정의를 탐구합니다. 그 속에서 마이클 샌델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정의 찾기’를 시도하는데요. 그가 원하는 정의는 난해한 정치 철학의 용어 속에 묻혀있는 정의가 아닙니다. 그는 진흙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뽀얀 진주처럼, 명쾌하고 단명한 정의를 찾기 위한 여정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가장 인상적인 점은 정의에 관한 우리의 자유주의적 관점에 일침을 놓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정의에 관한 자유주의적 관점’이란 무엇일까요? 마이클 샌델의 설명을 한 번 들어보시죠. ‘우리가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독립적인 존재라면, 우리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을 설정할 때, 특정한 도덕적, 종교적 사고에 좌우되지 말아야 하며, 좋은 삶을 규정하는 서로 다른 시각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 노력해야 한다.’ (P.302)

한 마디로, 정의가 들어설 특설 링은 만들어주되, 정의가 경기할 내용에 관해서는 ‘헤드뱅을 해라, 드롭킥 이후 슈플렉스로 제압해라’라고 왈가왈부해선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는 볼테르의 말처럼,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 정의에 따라 살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선 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정의에 관한 자유주의적 관점입니다.

칸트도 롤즈도 무엇이 좋은 삶이고, 정의가 어떤 도덕적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미덕과 부덕을 구분하기 위해 정의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죠. 대신 우리의 권리가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춰 정의를 규정했습니다.

칸트는 우리가 “가언명령”(네가 ~하면, 내가 ~하겠다)이 아닌 “정언명령”(~해야 한다)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개개인의 정언명령이 어떠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칸트는 “인간의 존엄성은 다름 아닌 보편적 법칙을 만드는 능력에 달렸다.”라고 말하며, 도덕적 법칙의 내용을 빈칸으로 남겨 놨습니다.(물론 그 법칙이 가져야 할 세 가지 성격을 제시하긴 했습니다. 때문에 ‘내 도덕적 법칙은 절도’, 이런 건 허용될 수 없는 거죠.)

롤즈 역시 우리사회의 부(결과물)가 분배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춰 정의를 규정했습니다. 그는 ‘자유 지상주의 체제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부당함은 “분배되는 몫이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대단한 임의의 요소에 부적절하게 영향을 받는 상황을 허용한다는 점”이다.’(P.215)라고 말하며, 우리의 부(결과물)가 좀 더 공정하게 분배되는 원칙이 바로 정의의 원칙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롤즈는 노력과 무관하게 우리가 갖고 태어나는 것들 (재능, 부, 가정환경 등)이 우리의 소득, 재산, 기회, 권력을 분배하는 것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주장한 것이죠. ‘타고난 환경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삶의 전망이 이런 임의의 현실에 좌우된다면 부당한 일이다.’ (P.214).

결국 롤즈도 부가 분배되는 방식에 초점을 맞췄을 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옳다는 얘기는 하지 않은 겁니다. 이렇듯 정의에 관한 자유주의적 관점은 ‘개인의 권리가 어떻게 보장받아야 하는가’만 생각했지, ‘어떤 행동이 바람직한가’란, 정의에 포함된 미덕의 요소에 대해선 덜 고민했습니다.

샌델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의를 좋은 삶에 대한 논의에서 분리하려는 시도는 두 가지 이유로 잘못이다. 본질적인 도덕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결정할 수 없고,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P.349) 롤즈는 “이성적 사고력이 뛰어난 양심적인 사람이 자유로운 토론 뒤에도 똑같은 결론에 이르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P.346)며 정의와 권리에 관한 공개 담론에서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샌델은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기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꿔야 한다.’(P.361)고 롤즈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만약 ‘어떤 행동이 바람직한가’란 고민 없이, 우리가 권리 분배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다고 생각해보죠. 그럼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마이클 센델은 <정의란 무엇인가> 1장에서 허리케인 피해를 입은 플로리다 지역에서 일부 상인들이 수재민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는 에피소드를 들려줍니다. 평소 250달러 하던 가정용 소형 발전기는 2,000달러에 팔렸고, 40달러 하던 여관방을 이용하기 위해선 160달러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폭리를 취하는 상인들의 태도엔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본능적으로 말이 튀어나옵니다. ‘저런 개자식들.’ 논리나 정의의 원칙은 둘째 치고, 가슴 속에서 뭔가 불끈하는 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을 무작정 개자식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실제 미국에선 상인들의 행위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붙었습니다. 한 쪽에선 ‘가격은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들이 자유롭게 거래한 내용을 부정하거나 비판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반대쪽에서는 ‘수재민이 처한 특수상황을 고려할 때, 플로리다에서 발생한 거래는 자유로운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며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요.

어떻습니까. 논쟁이 핵심 쟁점을 비껴나 빙빙 에둘러 가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문제의 핵심은 상인의 과도한 탐욕입니다. 그런데 우린 상인의 탐욕에 대해 비판해선 안 된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는 칸트와 롤즈로부터 이어진 오랜 전통, 즉, ‘의무와 권리를 정하는 원칙은 좋은 삶에 대한 주관적 견해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죠. 폭리를 탐욕이라 부르는 건 주관적인 견해에 기초한 판단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상인들의 탐욕은 사회의 공동선을 저해하고, 모두가 잘 사는 사회의 구현을 가로막습니다. 결국 탐욕적인 삶이 바람직한 삶이 아니라는 규정 없이, 사회 발전을 논의하는 건 너무 공허합니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P.362) 어떤 행동이 올바른 행동인지 결정해주고, 그런 행동을 장려해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야 말로, 정의가 갖고 있는 또 다른 의무입니다.

상당히 설득력 있지만 우려도 뒤따릅니다. 혹 불교를 믿는 대통령이 ‘좋은 삶은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라며 사회적으로 모든 육식을 금한다면. 또는 기독교를 믿는 대통령이 ‘술 담배를 금하노라’가 사회 정의 실현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면 어찌합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좋은 삶과 미덕에 대한 생각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자칫 소수가 생각하는 좋은 삶과 미덕을 모두에게 강요하지는 않을까요. 특히 독실한 기독교인을 대통령으로 모시고 있는 우리에겐, 더더욱 걱정되는 문제입니다. (매일 아침 조찬 기도회를 의무화 한다면. 헉.)

하지만 샌델은 좋은 삶에 대한 정의, 즉 미덕을 결정하는 것이 사회의 공동선에 이바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예상되는 몇 가지 주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1.시민 의식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많은 공립학교가 열악한 상황에 처한다면, 그리고 미국 사회의 극소수만이 군 복무를 담당한다면, 미국처럼 거대하고 다양한 민주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에 필요한 연대와 상호 책임 의식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P.365)-결국 시민 의식을 키우기 위해 평등한 교육을 강조한다.)

2.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인식해야 합니다. (‘사회적 행위를 시장에 맡기면 그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이 타락하거나 질이 떨어질 수 있기에, 시장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싶은 비시장 규범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있다.’(P.366)-시장이 좋아하는 것이 미덕은 아닙니다. 시장과 별개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원칙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3.불평등을 최소화해 연대와 시민의 미덕을 키워야 합니다. (‘공적 영역이 비어버리면 민주 시민 의식의 토대가 되는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키우기가 어려워진다. 결국 불평등은 공리나 합의에 미치는 영향과는 별개로 시민의 미덕을 좀 먹는다.’(P.368) 4.정치가 도덕에 어느 정도 개입해야 합니다.

물론 샌델의 주장이 한국 상황에선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권리에만 매몰돼, 도덕과 좋은 삶에 대한 고민을 등한시한 오늘날의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을 되돌아보게 만든 것만으로도 그의 주장은 충분히 가치 있습니다.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은 자칫 도덕적 상대주의나 아나키즘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보수적인 자유주의자들의 생각 역시 시장지상주의와 물질만능주의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정의란 무엇인가>는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동시에 사회와 개인의 발전을 위해 진보와 보수가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책 속에서 분열된 사회가 발전을 위해 소통하고 화합할 수 있는 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번 휴가 때 <정의란 무엇인가>를 챙겼다는 얘기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물론 단순한 해프닝으로 그치고 말았는데요. 전 단순히 해프닝이 아닌, 진짜로 이 대통령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책을 손에 집어 들었다면, <정의란 무엇인가>의 운명이 항상 앞 두 챕터까지만 손때가 묻어있던 내 수학정석의 운명을 따르지 않길 바랍니다. 졸려도, 내용이 조금 어렵다 하더라도, 무협지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대통령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정독해 내용을 실천에 옮긴다면, 남은 3년은 지난 2년보다 훨씬 나은 시간이 될 거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책, 영화, 여행을 통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는 부지런한 블로거, ‘알스카토’입니다. (http://blog.naver.com/haine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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