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또,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서로가 서로를 돕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의 부분을, 부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조립품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구라는 거대한 공장에서 서로를 조립하고 있는 셈이다.” - 김중혁, 『메이드 인 공장』 중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물화(物化, Versachlichung, reification)'된 세계이다. 모든 인간은 사물을 통해 관계 맺고 살아간다. 자본주의 사회가 고도화되면서 그 물화의 체계가 변화되고 심화되었을 뿐, 여전히 우리 관계 맺음의 근간에는 '사물'이 있다. 하지만, 거기서 본질은 그 사물과 사물로 맺어지는 체계의 핵심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일찍이 마르크스는 물화된 세계인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소외'를 일갈했다.

지난 27일 방영된 EBS 다큐 프라임 <내 운동화는 몇 명인가>는 가장 흔한 사물인 운동화를 통해, 그 속에 소외되어 있던 '인간의 세계'를 드러낸다.

사물의 이야기, 곧 인간의 이야기

EBS <다큐 프라임> ‘내 운동화는 몇 명인가’ 편

사물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86년 삽화가 안자이 미즈마루와 함께 공장을 견학하여 당시 일본의 산업을 생생하게 그려낸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 뜨는 나라의 공장』이 그러했고, 2014년 한겨레신문을 통해 써내려간 칼럼을 모아 책으로 출간한 김중혁 작가의 『메이드 인 공장』 역시 공장이란 공간을 통해 사람과 시대와 공간을 복기해냈다.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철학적 메시지를 건져내는 데 탁월한 알랭 드 보통은 『일의 기쁨과 슬픔』을 통해 일, 즉 노동 현장의 생생함을 삶의 철학으로 설파한 바 있다. 물건이 드나드는 항구에서 화물선 관찰하기로부터 시작되는 그의 시선은 이내 물류로, 그 물류의 흐름을 타고 퍼져나가는 통조림, 그리고 우리가 하찮게 지나치던 그 통조림의 라벨이며 간과되기 쉬운 사무의 자잘한 업무들- 회계, 창업 등등 말 그대로 '일'의 전반적인 영역에 세심한 관찰과 촌철살인의 혜안을 내보인 바 있다. 거친 바다에서 잡힌 참치가 사람들의 손을 통해 어떻게 통조림 캔으로 변신하게 되는가, 그 과정에 차곡차곡 쌓인 '직업'의 여정은 그 결결이 쌓인 사람들의 행보에 새삼 전율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EBS 다큐 프라임 - 내 운동화는 몇 명인가>는 TV로 온 『일의 기쁨과 슬픔』과도 같다. 우리가 매장에서 각자의 개성과 패션 감각에 따라 선택하는 운동화 속에 담긴 사람들, 그들의 일이 한 시간여의 다큐를 통해 묵직하게 전달되어 온다.

내 운동화는 어떻게 내게로 왔을까

EBS <다큐 프라임> ‘내 운동화는 몇 명인가’ 편

시작은 마치 남태평양의 참치잡이처럼, 운동화의 원료가 생산(?)되는 말레이시아 열대 우림에서이다.

마이딘 빈 안실, 67세, 255mm의 신발을 신는 그는 말레이시아 뚜아란 숲에서 운동화 밑창의 원재료인 고무를 채취한다. 영국 식민지 이래 독립 이후까지 말레이시아의 주요산업이 된 고무 채취 산업의 종사자이다. 허리에 모기향을 메고 고무나무에 칼집을 내 고무액을 채취하는 작업을 1분에 다섯 그루, 그와 같은 일꾼들이 하루에 500그루 분량을 채취한다. kg당 만 원을 받는, 오로지 손으로만 해야 하는 작업. 70~80 링긴, 하루 20만 원 정도의 벌이, 젊은 시절 한때는 도시에서의 삶을 꿈꾸기도 했지만 6명의 자녀와 12명의 손주를 키워낸 이 일이 혹시라도 고무 신발을 신은 관광객이라도 마주치면 반가움이 앞설 정도로 이젠 '자부심'이 되었다.

마이딘이 채취한 고무는 모아져서 화학 약품으로 세척, 불순물을 제거한 후 얇고 부드러운 고무로 만드는 과정은 195명의 말레이시아 원주민이 주축이 된 사바의 가공 공장에서 이루어진다. 그 가운데 카트리나 빈티 와시(45)가 있다.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인도네시아인 남편과 결혼한 후 안정된 일자리를 찾아 사바 지역까지 온 그녀가 주로 하는 일은 35kg 단위로 만들어진 고무 블록을 포장하는 일이다. 대부분의 원주민이 그렇듯이 농사일과 공장일을 병행하는 그녀와 남편의 맞벌이는 자식 교육에 집중되어 있다. 지금보다 더 성공한, '고무 공장 홍보' 일과 같은 사무직으로 전향을 꿈꾸는 그녀에게 고무는 풍족한 삶의 근원이다.

다른 이의 삶과 얽혀있는 한 사람의 삶

EBS <다큐 프라임> ‘내 운동화는 몇 명인가’ 편

말레이시아에서 채취되어 1차 가공된 고무는 멀리 슬로바키아까지 여행을 떠난다. 슬로바키아 파르티잔스케는 1930년대 후반 신발 공장이 생기며 형성된 도시, 그곳에 도착한 고무는 본격적으로 운동화로의 변신을 시작한다.

요제프 샤레이와 얀 쿠노하는 10대 후반부터 이 공장에서만 48년, 40여년을 일했다. 퇴직을 했었지만 공장으로 다시 돌아온 두 사람은 기계의 소음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거대한 롤러로 고무를 펴서 신발에 맞춰 재단하고 운동화 갑피에 얹는 일.

1939년에 만들어진 공장은 1년에 4백만 켤레를 생산하며 만 오천 명의 노동자가 북적이던 시절도 있었다. 슬로바키아의 올림픽 영웅 요제프가 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운동화를 신고 트랙을 내달리던 88년, 그 시절을 정점으로 더는 공장의 기계와 작업공정은 새로워지지 않았다. 1990년대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사양 산업이 되어가는 운동화 산업. 퇴직했던 요제프나 얀이 돌아와서 일해야 될 정도로 일손이 귀해진 공장. 이들은 자신들이 나이 먹어가듯, 자신들의 시대가 이 낡은 공장과 함께 저물어 가는 걸 실감하며 슬퍼한다.

신발과 함께 경력 30년 그녀의 손에서 운동화 패션이 완성되는 갑피 제작에 종사하는 마리아 아담 초바(57)에게 역시 공장은 나의 집, 그녀의 인생이다.

가장 일상적인 운동화를 전해주는, 일상과 먼 삶을 사는 사람들

EBS <다큐 프라임> ‘내 운동화는 몇 명인가’ 편

저물어가도록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운동화는 슬로바키아의 공장에서 탄생하여, 비로소 운동화로서 첫 여정을 떠난다. 슬로바키아에서 독일 함부르크로 그리고 다시 항구에서 배를 타고 남중국해 싱가포르와 홍콩을 지나 부산까지, 9800켤레 동료들과 함께 컨테이너박스 안에 담겨 5주간의 여행에 몸을 싣는다.

그 여정에는 이제 갓 신혼의 일등 항해사 35세 한국인 권태수 씨와, 12년 경력의 갑판원 36살 미얀마인 묘 코 코우 씨가 함께한다. 선실에서 화물을 관리하고 선체를 정비하는 일을 사무하는 항해사와, 직접 몸을 움직여 컨테이너를 고정하고 청소하는 갑판원의 협업을 통해, 그들이 모르는 컨테이너 속 신발들은 안전하게 부산에 도착하여 거리를 누빌 수 있다.

2016년 기준 우리나라는 1억 8000만 켤레의 신발을 수입했다. 무심코 신은 내 컨버스 운동화 한 켤레가 그리 오래 여행의 산물이었다니.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던 말레이시아의 고무채취 인부와 가공공장의 아줌마 노동자, 운동화가 평생의 열정이라는 슬로바키아의 노익장 노동자, 그리고 컨테이너선의 한국인 항해사와 미얀마인 갑판원 등이 내가 신는 운동화 한 켤레에 담겨 있다. 아니 함부르크 항에서 컨테이너선을 옮긴 부두 노역 노동자와, 함부르크까지 옮긴 트럭 운전수, 말레이시아에서 바다 건너 슬로바키아까지 옮긴 선원들은 또 어떻고.

EBS <다큐 프라임> ‘내 운동화는 몇 명인가’ 편

물류만이 아니다. 고무에서 시작했지만 운동화 갑피가 되는 천과 가죽의 원료에서 이어지는 여정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해져야 하는 건지, 내게 운동화를 건넸던 그 가게의 아르바이트 생 또한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세상은, 세상 사람들은 운동화 한 켤레에서도 이렇게 서로 이어져 있다.

운동화는 그저 운동화가 아니라, 그들의 노동이며 열정이요 삶이다. 일찍이 어느 시인이 너는 뜨거운 사람이었냐며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 했는데, 이젠 그 운동화에 담긴, 연탄만큼 활활 타올랐던 수많은 삶이 무거워 함부로 발길질을 못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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