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2일 시무식을 하면서 1년짜리 타임캡슐을 만들었었다. 새해 계획을 세우면서 자기와의 약속을 얼마만큼 지켰는지 1년 후 확인해보자는 이벤트였다.

사원 중에는 이런 이벤트가 있었는지 1년 새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도 있었고 자기에게 보낸 편지인데도 자필을 확인하지 못해 다른 사람의 편지를 가져가는 사람 등 작은 소동도 벌어졌다.

결혼 8년만에 기적같이 쌍둥이를 얻은 기술팀장은 1년 전 예비 아빠로서 감동과 포부, 가족 사랑을 담은 메시지를 공개했고, 기획운영팀 김차장은 라이센스라도 취득하자는 자기와의 약속을 지켜서 지난 연말에 자격증을 취득했다며 자랑스럽게 보고하기도 했다.

▲ ⓒ 김사은PD
나도 딱 1년 전 같은 자리에서 쓴 새해 계획서를 펼쳐들고 잠시 상념에 젖었다. 시간의 허무함과 더불어 그 시간만큼 충실하게 살았는지 더럭 겁도 났다. 메모처럼 흘려 쓴 몇 가지 계획 속에 재미있는 사실도 발견했다. 지난 한해 나의 목표는 "공부하는 한해"였다. '방송 잘 만들기'(여전히 맑고 밝고 따뜻한 시각으로)는 당연히 해야 할 과제이고, '책 펴내기를 포함한 다양한 글 쓰기 시도'같은, 당시로선 상당히 생경한 계획들도 들어있었다.

조목조목 썩 만족할만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새해라고 해서 어떤 항목은 들어내고 어떤 항목은 보완할 것도 없이 이 계획 이대로 다시 1년 열심히 살아보자고 마음을 추스르다가 슬그머니 "여행" 항목을 한 가지 더 추가했다.

대신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카피처럼 '열심히 일한 후, 내 자신에게 주는 대가'라는 단서를 달았다. 라디오 방송은 데일리 프로그램이 다수이다 보니 내가 빠지면 빈자리를 누군가 다른 동료가 채워야 하는데, 그 동료들 역시 맡은 바 업무량이 녹록치 않은 실정이다. 이러다보니 장기 휴가나 출장은 엄두조차 내지 못해 정해진 휴가 일수조차 채우지 못한 사람이 다수이다.

"여행"이라고 써 놓은 것은 그야말로 계획이자 희망에 불과한 단어인 셈인데, 그래도 계획이라도 세워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아 '희망사항'에 불과할지라도 우겨 넣고 싶었다.

그 다음에 방송 기획을 염두에 두고 PD연합회에서 펴낸 취재수첩 첫 페이지의 <방송프로듀서 윤리강령 전문(前文)>을 읽어보았다.

중간 부분 '이로써 방송프로듀서는 우리사회의 오랜 숙제인 계층 간의 격차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지역 간의 불화를 해소하고 인간다운 삶의 공간을 확보하며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시대적 소명을 다한다'에 빨간색으로 밑줄을 그으면서 여러 번 되풀이해 읽는다.

올해는 계층 간 격차와 세대 간 갈등 그리고 지역 간 불화를 해소하는 프로그램 개발에 관심을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 방법을 연구해본다.

우리 방송은 장애인을 배려하는가, 우리 프로그램은 노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우리 프로그램은 어린이를 의식하고 있는가, 우리 프로그램을 농민의 소리를 담고 있는가? 우리 프로그램은 지역간 계층 간 화합과 상생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장애인과 노인들이 퀴즈 프로그램이라도 한번 참여하려고 한다면 기회가 충분히 주어질 것인가? 장애 때문에, 나이 때문에 프로그램 참여가 용이하지 않은 건 아닐까? 한번 주어진 과제는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을 듯 하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계속 고민하면 조만간 새로운 방법이 찾아지지 않을까? 설령 그 답을 금방 찾아낼 수 없다 할지라도 1년 내내 연마하면 내년 이맘때 쯤 괜찮은 방법 하나 찾아낼 지도 모를 일이다.

올 한해, 여행계획은 뒷전에 밀리더라도 라디오를 통해, 지역간, 세대간, 계층간 격차를 해소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괜찮은 프로그램하나 건지고 싶다. 1년짜리 타임캡슐에 이렇게 써놓고 보니 그 소망이 더욱 간절해진다.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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