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2가에서만 20년을 일해 온 나는 추운 겨울의 청계천 고가도로 밑의 을씨년스러움을 기억한다. 주변의 가게에 갈 일이 아니면 자주 들러볼 일이 없는, 그래서 시내 한 복판 도심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외진 느낌을 주는 공간, 그 안에서 삶을 일구어가는 사람들의 분주함과 땀이 느껴지기보다는 10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황량함이 먼저 다가오는 곳이었다. 아낙들의 빨래터, 아이들의 멱 감던 놀이터, 5-60년대 빈민들의 거처였던 곳에, 속도와 성장의 깃발 아래 개발시대의 상징물 청계천 고가도로가 세워져 30여년을 자리하다가 몇 년 전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사라졌다.

▲ 경향신문 2008년 1월5일자 1면.
청계천 복원의 의미는 4차로의 우뚝 솟았던 고가차도가 사라지고 물길이 다시 생긴 외양의 변화도 있지만, 빠른 속도의 차들이 날아다니던 자동차 길을 사람들이 물과 하천 옆의 초목을 보면서 천천히 걸을 수 있는 사람 길로 바꾼 게 더 크다.

청계천의 복원 사업은 이명박 당선자의 대선 가도에 엔진을 달아준 사건이었다. 과거 어두컴컴한 청계천 고가 밑의 스산함을 기억하는 세대에게 깨끗하게 잘 정돈된 지금의 청계천은 큰 놀라움을 안겨주었지만, 복원 사업 완공 후 2년여 지난 지금 그 놀라움이 감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를 되묻게 된다. 당시 이명박 시장의 임기 내 완공을 고집하지만 않았더라면, 토목사업이 아닌 진정한 복원을 위해 문화재의 발굴과 원형 복원에 좀 더 시간과 노력을 더 들였더라면, 청계천이 원래 건천(乾川)이라 물이 부족하여 물을 끌여와야 하는 불가피함이 있지만 상류와 주변의 실개천을 살렸다면 등등의 아쉬움이다.

수십년 묵은 숙제, 개발시대의 상징을 털어내고 청계천을 복원하는 공사를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이뤄낸 일에 많은 사람들이 경탄하고 놀라워하였다. 우리나라 최대의 건설회사 CEO를 지낸 시장이 할 수 있는 토목 사업, 청계천 공사를 빠른 시일 내에 해낸 것이다. 그것까지이다. 이명박 시장에게 너무나 익숙한 토목이나 건설사업으로의 청계천 공사가 아니라 문화 복원, 역사복원 사업으로 청계천 공사가 이루어졌다면 가히 더 큰 감동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1995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세계 사회개발 정상회의(WSSD,World Summit for Social Development)가 있었다. 사회개발(Social Development)의 개념은 경제개발 일변도의 지구촌사회에 대한 자기반성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급속한 경제개발이 가져다 준 폐해를 빈곤, 사회적 약자, 환경, 인권, 저개발국 지원, 복지 등 사회적 측면의 발전을 통해 극복해나가고자 했다. 세계의 115개국에서 정상과 정부대표들이 참여한 이 회의는 특히 도시·주택·교통·보건·의료·공중위생·사회복지·교육 등의 사회개발과 복지의 향상에 주목하였고, 그에 따른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을 선언으로 채택하였다. 이 회의가 주는 의미는 모두가 경제개발과 경제 성장에 몰두하고 있는 때에, 이 지구촌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주목하고 사회개발과 시민사회의 성장에 귀 기울이자는 깃발을 든 것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치룬 지 2주일이 지났다. 인수위원회와 대통령 당선자의 의욕적인 모습들이 연일 언론 매체에 비쳐지고, 그들을 만나는 대기업의 총수들, 중소기업인들, 각종 경제관련 단체장들의 화기애애한 모습들이 이어지고 있다. 친기업 정부, 시장 친화적인 정부는 이명박 당선자측이 이미 내세운 방향이고 굳이 주장하지 않더라도 짐작할 수 있는 바다.

▲ 한겨레 2008년 1월4일 1면.
새정부는 당선자와 주변 인사들의 능력과 경험으로 볼 때 익숙한 분야인 기업의 투자를 촉진하는 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일자리를 만들고 사람들의 주름을 펴주는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명박 후보를 선택한 유권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고 소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명박 당선자가 너무 익숙한 개발과 경제성장의 깃발에 포위되지 않기를 바란다. 좀 낯설고 익숙지 않지만 인권과 환경의 가치, 소외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한 노력, 시민사회의 성장과 남북의 평화 공존을 위한 진취적 노력 등 사회개발의 기치를 내세우고 차근차근 실천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익숙한 것과 이별하는 일, 익숙지 않은 것에 도전하다 새로운 것에 부딪혀 다치고 깨어질 수 있고, 또 희생과 고통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과정에서 보여지는 감동이 정치의 요체다.

대학 때 총기독학생회장을 지냈다. 졸업 후 서울YMCA 청년회원 활동을 시작해 87년 간사를 거쳐 올해 7월 시민운동에서만 20년이 지났다. 소비자보호, 법률구조, 사법개혁, 방송개혁, 공정거래 등 시민생활의 크고 작은 일에 함께했다. 시민의 것을 빌려 쓰면서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이들로 인해 피해당하는 시민 삶의 현장을 살피겠다. 강물처럼 흐르는 시민, 소비자의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 알려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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