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참모들의 방송정책 언급, 점령군 같아

다른 분야에서도 비슷하지만, 언론과 방송(정책) 분야에서 이명박 당선자의 핵심 참모들의 언행을 보면 마치 점령군 같다. 일정 부분 이해는 한다.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The winner takes all)' 것이 관행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병국 의원은 최근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당하고 거침없이’ 이명박 정부의 언론정책과 방향을 쏟아내고 있다.

요지는 이렇다.

향후 불합리한 규제는 완화하고 미디어 정책 전반을 시장 기능에 맡기는 방향으로 갈 것이고, 방통융합에 따른 새로운 매체 등장에 따른 제도적 정비에 신속하게 나서고,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허용하고, 한나라당이 2004년 11월 국회에 제출한 국가기간방송법안을 조속히 통과시키고 MBC의 주식 70%을 가지고 있는 방송문화진흥회의 해체를 통해 MBC를 민영화하고, 이에 따라 KBS 정연주 사장과 MBC 최문순 사장은 임기 전에 교체될 것이라고 장담하듯 예측하고 있다.

▲ 한국일보 2007년 12월31일자 6면.
정 의원은 이명박 후보의 홍보기획위원장을 지냈고 한나라당의 언론특위 위원장도 맡고 있다. 말하자면, 이 당선자의 언론정책 수립의 핵심 실무자인 셈이다. 그래서 그의 언급에는 자신감 이상의 분위기가 느껴지고, 관계 당사자들은 협박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나라당이 방송장악에 조급한 4가지 이유

조급하면서도 협박처럼 들릴 수 있는 한나라당의 행태를 4가지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이명박 캠프에는 주로 보수적인 신문사와 방송사 출신 인사 수십명이 대선 전부터 활동하고 있어 그들에게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의 하나일 것으로 생각한다. KBS와 MBC 사장 자리 등을 노리는 사람들이 한 두명이 아닐 것이다.

둘째, 지난 대선 과정에서 사실상 한나라당의 ‘비공식 선거운동본부’처럼 보도한 족벌신문들에게 (지상파) 방송 진출은 생사가 걸린 문제이다. 따라서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는 이들에게 빠른 시일 안에 보상을 약속하거나 시사(示唆)할 필요가 있을 것이고, 이를 위해 방송정책을 초기에 밀어부쳐 기선을 제압해야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만의 하나, 그런 담보가 전제되지 않으면, 족벌신문들과 이명박 정부의 밀월 기간은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셋째,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가 1997년과 2002년 등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유가 다름 아닌 (지상파)방송 때문이었다고 한나라당은 공개적으로 주장해 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방송 때문에 두 차례 대선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한 한나라당은 2003년 방송정책에 관한 당론을 발표한 바 있다. 핵심은 3가지다. 첫째는 KBS 1TV 와 KBS 2TV의 분리, KBS 2TV와 MBC의 민영화, 그리고 신문과 지상파 방송의 교차소유 허용 등이다.

▲ 한국일보 2007년 12월26일자 1면.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전개한 독재 정치권력으로부터 방송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줄기찬 파업 투쟁의 결과, KBS와 MBC 두 공영방송은 적어도 정치권력으로부터는 자유로운 방송이 되었다. 심지어 사장을 비롯한 그 누구도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아니 애써 무시하고, 이제 권력을 잡았으니 방송만 장악하면 이미 손아귀에 들어온 신문을 포함하여 모든 언론을 가지고 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넷째, 경향신문 이재국 기자가 지난 달 28일 열린 17대선 언론보도 평가 토론회에서 지적한 것처럼, 한나라당과 족벌신문들로 구성된 이른바 보수(수구)반동복합체는 ‘잃어버린 10년을 완벽하게 되찾는 마지막 승부처'가 4월에 있을 국회의원 총선거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마지막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KBS와 MBC 등 두 공영방송을 제압하거나 길들이는 것은 절체절명의 과제라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요즈음 정병국 의원 등이 언급하는 이명박 정부의 언론정책의 방향은 지금까지 한나라당의 당론을 거의 대부분 그대로 반영한 것이며 이같은 배경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신년사를 통해 본 정연주 사장의 오판

한편, 2일 시무식에서 KBS 정연주 사장은 신년사를 발표했다.

▲ KBS 정연주 사장
정 사장은 신년사에서 “정치적인 환경 변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흔들림 없이 공영방송 본래의 책무와 언론기관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언론기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역사적 사회적 책무가 있습니다. 정치권력이든 자본권력이든 언론권력이든, 혹은 사회적 집단이 집단 이기주의를 위해서 자기의 권력 확대를 꾀하건 우리는 그 어떤 권력에 대해서, 특히 오만한 권력에 대해서 의연하고 당당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언론 기관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책무 중 하나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언론기관인 KBS 스스로가 겸허해야 합니다.”고 말했다.

이어 정 사장은 “우리는 낮은 곳에서 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고 가진 것 없는 사람 편에서 오만한 권력, 지배하려는 권력에 대해서 가차없이 비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치적 독립성, 정체성, 자율성은 특히 방통 융합 과정에서, 그리고 새 정부의 출범 이후 있을지 모르는 방송 구조 개편 과정에서 그것을 지켜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정치적 독립성, 자율성, 공영방송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 그것 없이 KBS가 공공 가치의 중심이 되기는 어렵습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 사장은 의외의 발언을 했다. 정 사장은 KBS 본관 앞에 걸려있는 ‘쟁취 수신료 현실화, 수호 공영방송’이라는 노동조합의 2가지 걸개 내용이 매우 의미심장하며, '이는 지금 KBS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행동 강령'이라고까지 강조했다.

공영방송 중의 공영방송, 혹은 국가기간방송으로 불리는 KBS 정연주 사장의 발언은 액면 그대로 보면 옳은 얘기다. 틀린 구석이 전혀 없다.

수신료 인상과 공영방송 사수, 두 마리 토끼 못잡아

그러나 싸움은 현실이다. 말로는 국가와 국민을 외치면서도 사리사욕 추구가 몸에 밴 세력에게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리와 집권은 모든 것이 가능한 무소불위의 자리다. 그런 대 승부처에서 한나라당은 승리했다.

이명박 정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상파 방송을 장악하려 들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생생하게 보고 있지 않은가?

▲ 서울 여의도 KBS 본관 ⓒ미디어스
정 사장의 언급처럼, 27년 동안 2,500원에 묶여 있는 수신료 인상과 공영방송 체제를 지켜내는 일은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방송의 궁극적인 주인인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공영방송’을 만들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KBS와 정 사장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한나라당의 기도 앞에서 수신료 인상이라는 당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수신료 인상과 공영방송(체제) 사수라는 두 가지 과제 중 어느 것이 더 절체절명의 과제인지는 정 사장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두 가지 목표를 다 얻으려다 둘 다 잃게 될 것이다.

‘수신료 현실화’ 쟁취 구호를 ‘공영방송 사수’ 구호 앞에 놓는 안이한 현실 인식으로는 한나라당의 방송장악 기도를 결코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수신료 인상과 정 사장 퇴진 맞바꾸자고 시도할 수도

오히려, 이명박 정부는 KBS 수신료 인상과 ‘KBS 정체성의 제도적 보장’이라는 속 보이는 달콤한 카드와 KBS와 MBC에 대한 분할통치(divide & rule) 전략으로 양 방송사 조합원들이 연대의 깃발을 들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할 것이다.

이명박 캠프 입장에서는, 아직도 KBS 내부에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부터 권력의 나팔수 노릇을 하거나 정치권에 줄을 대려고 기웃거리는 인사가 적지 않다는 것을 손바닥 보듯이 들여다 보고 있다. 이명박 캠프에 일하는 KBS 출신들이 좀 많은가?

다행히, 공영방송 체제를 지키려는 언론노조 조합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의 성원과 투쟁으로 한나라당의 분할통치 전략이 불발로 그치면, 정연주 사장만 내쫓는데 동의하면 수신료를 인상해 주겠다는 카드 아닌 카드를 내밀 것이다. 정 사장은 사원들로부터 토사구팽 당할지도 모른다. KBS와 정 사장은 안이한 현실인식에서 벗어나라!

KBS와 MBC 두 공영방송의 사수는 KBS와 MBC 만의 문제도 아니요, 정 사장과 최 사장의 문제만은 더더욱 아니요, 여론 다양성의 확보와 나라의 민주주의와 미래가 걸린 문제다.

정 사장에게 한 마디만 덧붙인다.

옛날 시골에서 살 때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은 얘기다. 농부가 황소를 몰고 깊은 산속을 가다 호랑이를 만나는 수가 있는데, 그 때 주인이 먼저 소를 버리고 도망가면 소도 지레 겁을 먹고 머리를 돌려 도망가다 호랑이한테 물려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주인이 소 고삐를 붙들고 정면으로 호랑이를 응시하면서 대결자세를 취하면 소도 뒤로 물러서거나 도망가지 않고 주인과 함께 호랑이한테 대든다는 것이다. 호랑이 입장에서도 황소의 뿔과 덩치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상처를 각오한 싸움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사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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