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1심법원의 판결은 무죄였다. 일단 여성계는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려하던 바가 현실화됐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법원의 이번 판결은 우리나라의 법체계가 사회의 변화와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 괴리의 판결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판사가 피해자의 증언을 믿어주고자 하더라도 현행 법체계 속에서는 위력에 의한 간음을 입증하기도, 벌을 주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행법의 한계는 차치하더라도 이번 1심법정에서 검사와 피고인 측 다툼에서 ‘피해자다움’의 논쟁이 있었다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우리나라 법정의 시계가 아주 오래전 과거에 멈춰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14일 오전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법원의 1심 무죄 선고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연합뉴스)

업무상 위력은 꼭 성폭력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조직 내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어떤 형태의 폭력을 입었을 경우 그에 저항하기보다는 전보다 더 복종하거나 친밀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은 흔한 을의 생존방식이다. 이번 법정에서 여전히 ‘피해자다움’의 논쟁이 있었다는 것은 많은 성폭력 법정에서 벌어지는 피해자 망신주기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투 운동 이전에도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범죄에 대한 경찰 입건 수는 증가했다. 범죄가 늘었다기보다는 이를 고발하는 피해자들이 증가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다만, 그런 피해자들의 용기와는 반대로 이를 벌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우리 현실이었다.

KBS2 <추적 60분> ‘안희정 前 지사 1심 무죄 위력의 무게’ 편

<추적 60분>이 이 문제를 빠르게 파고들었다. <추적 60분>의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 우리나라 수많은 재판 중에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유죄판결을 받은 예가 거의 없다고 한다. 다만 민사재판에서는 인정받은 단 하나의 경우가 있었을 뿐이다. 반면 위력에 의한 성폭력에 대한 신고는 매해 수백 건이나 존재했다.

그렇지만 성폭행 판결은 고사하고 기소조차 드문 것이 현실이다. 가장 심했던 2016년의 경우 엄무상 위력 성범죄로 경찰에 입건된 수는 321건이었지만 그중 기소가 된 것은 고작 1건에 불과했다. 세상을 들었다 놓은 안희정 전 지사가 무죄가 선고될 정도면,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고발들이 검찰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KBS2 <추적 60분> ‘안희정 前 지사 1심 무죄 위력의 무게’ 편

이번 판결에서도 드러났듯이 현행법은 가해자의 폭행이나 협박으로 인한 피해자의 ‘항거불능’의 전제 속에서만 강간죄를 적용한다. 안 전 지사 판결로 널리 알려진 “노 민스 노 룰” 다시 말해 비동의 간음죄는 아직 현행법에 적용되지 않고 있다. 물론 준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투 운동이 촉발된 올 초 ‘발의전문’ 국회답게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비동의 간음죄’의 신설이나 강간죄 구성요건의 완화에 대한 법률개정안이 발의되었다.

이렇게 법안들을 고치고, 새 법도 만들어야 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은 곧 현행법으로 비동의 간음죄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들 법안이 발의된 것이 지난 3월이었고, 국회가 미투 운동에 대해 정말로 깊이 공감했더라면 서둘러 처리할 수 있었을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법안통과는 고사하고 법사위에서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많은 위력에 의한 성폭력 가해자들과 공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대한 직무유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하지 않는 국회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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