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콘 모터 돌아가는 소리와 자판기 소리만 또드락 또드락 공간을 휘젓는 오후, 방송국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먼저 전화를 받은 기획운영팀 김차장은 몇가지 얘기를 나누더니 “팀장님, 애청자라는데요, 전화 좀 받아보세요.”라며 전화를 연결해줬다. 대뜸 “지난번 비 많이 온 날 있잖여~”로 시작된 이 전화, 밑도 끝도 없다. 잠시 갈등이 인다. 계속 대응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방송국에 걸려오는 전화는 다양하다. 간혹 애청자를 빙자한 스토커가 업무를 가로막기도 하고 물건판매, 월간지 주간지 권유 등 생산적인 일보다는 시간적 경제적으로 소모적인 일도 많다. 먼저 전화를 접수한 김차장은 그래서 더욱 심사숙고했으리라. 의자에 깊숙이 앉아 펜을 준비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들어보기로 했다.

“긍께 3~4일전에 익산에 비가 겁나게 왔잖여요”
“네, 지난 주말에 폭우가 쏟아졌죠”

(8월13일부터 전북지방에 쏟아진 비로 큰 피해가 발생했다.)

“나도 화물차 운전하는 사람인디, 왕궁 신정부락에서 궁평으로 가는 다리가 있어요. 내가 새벽에 갔는디 내가 갔을 때는 다리가 끊어져 부렀어요.”
“예, 그때 궁평교가 붕괴됐다고 하네요.”
“맞아 맞아 내가 그 다리를 갔다니께. 근디 5톤 화물차 탑차 기사가 처음 지나다가 그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차하고 같이 빠져버렸대요. 근디 그 운전자가 차하고 한 300미터쯤 떠내려갔다는 구만요. 그러다가 겨우 차에서 빠져나왔는디, 다리가 끊어져부러서 위험허잖요. 긍께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왔시요. 그래가지고 수신호로 차를 막았다니께.”
“그때 날짜하고 시간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비가 겁나게 온 날이었당께. 시간은 새벽4시50분이여. 일요일이여. 나 말고도 새벽기도 간다고 나온 사람들도 그 사람이 말렸당께. 그러고나서 사람들이 신고해가지고 경찰이랑 오고 그런거여.”

제보자의 용건은 이렇다. 그때 그 사람 덕분으로 큰일을 면했는데 생각해보니까 그 사람 연락처도 모르고 물에 젖은 채 바들바들 떨면서 오는 차량을 막았는데 그런 사람을 찾아서 칭찬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그때 사고일지도 있을 거니까 차량 번호만 확인하면 금방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방송국에서 이 사람을 찾아서 널리 알려 달라…….

제보자 소정섭씨의 사연을 들으니 그날의 상황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칠흙같이 어두운 새벽, 한 운전자가 궁평교를 지나다가 다리가 붕괴되는 바람에 300여미터를 떠내려간다, 운전자는 기를 쓰고 차에서 빠져나와 목숨을 보전하지만 다른 사람의 안전이 걱정되어 다시 사고 현장으로 돌아가 수신호로 차량을 통제한다. 그 덕에 소정섭씨와 교회가던 주민 등 다른 사람들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경황이 없어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감사인사도 못했다는 소정섭씨는 운전자의 선행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아침의 향기 오프닝으로 이 사연을 소개하고 연합뉴스 임청기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임기자는 “그런 일이 있었다면 뉴스감”이라며 취재를 시작하더니 몇 시간 후 제보보다 더욱 감동적인 소식을 기사로 전해왔다.

▲ 기사의 주인공 진승용씨(44.화물운수업ㆍ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연합뉴스
화물운수업을 하는 44살의 진승용씨, 경기도에 사는 그는 초행지인 궁평교를 지나면서 다리가 붕괴된 사실을 모르고 탑차와 함께 다리밑으로 추락했다. 300미터를 떠내려가다 겨우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나왔지만 거센 물살 때문에 또다시 500미터 가량 떠밀려 가던 중 필사적으로 헤엄쳐 둑에 올랐다. 두 번씩이나 사경을 헤맨 진씨,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현장으로 내달린다. 얼핏 생각해도 1키로미터 남짓한 거리다. 폭우를 뚫고 현장으로 돌아와 차량 7대를 제지하고 10여명의 목숨을 구했다. 그런데 사태가 수습되고 긴장이 풀리자 갑자기 통증을 느끼게 되었고 궁평교에 추락할 때 장기가 손상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익산병원에서 치료중이다…….

연합뉴스 임청기자는 진승용씨를 취재하면서 익산시청에 건의를 해 표창장을 수여하는 방안이 검토중이라고 전해왔다.

이 기사가 보도되고 포털에 알려지면서 네티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감동과 찬사가 이어졌다. 정말 내가 봐도 이시대의 진정한 영웅이 아닐 수 없다. 지역신문도 연달아 미담을 게재하면서 진씨의 살신성인에 박수를 보냈다. 반가운 소식이 또 전해졌다. 진씨가 입원해있는 익산병원에서는 급류에 휘말려 부상을 당하고 간신히 빠져나와 더 큰 인명피해를 막은 진씨의 정신이 귀감이 되도록 병원비 전액을 후원해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진씨는 정밀검사를 받고 있으며 결과에 따라 가까운 시일내 퇴원날짜를 결정할 거라고 한다. 진승용씨의 목소리는 10여명을 구한 영웅답게 깊이있고 신뢰감이 있었다.

소정섭씨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자 그 역시 “정말 잘됐다”고 크게 기뻐했다. 수희공덕(隨喜功德)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이 잘 한 일을 내가 잘 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좋은 일을 나의 좋은 일처럼 같이 따라서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더불어 기뻐해 주면 바로 그것이 나의 공덕으로 쌓인다는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 10여명의 목숨을 건진 진승용씨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공덕을 쌓았다면 이런 사실을 알리고 함께 칭찬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소정섭씨 역시 수희공덕을 행한 것이다.

무섭게 들이 붓던 비는 그쳤다. 폭우로 인해 익산 지역에는 최고 300㎜가 넘는 집중 호우가 쏟아지면서, 자치단체 추산 130억여 원의 피해액이 발생, 이와 관련 특별재난지역 선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 이 지역은 폭염에도 불구하고 수해복구가 한창이다. 그 와중에 인명피해가 적었던 것은 사력을 다해 위험을 알린 진승용씨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고 두고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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