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 직후만 해도 ‘1당’의 시대가 오는 분위기였는데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 국정지지율 하락세가 뚜렷해지면서 심상찮은 분위기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은 국정 수행의 심각한 문제를 불러올 수준은 아니다. 이전의 70%대 지지율은 지나치게 높은 수준이었다. 이전 정권 파행의 반사이익이 상당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득표율은 40%를 넘는 수준이었다는 걸 돌아보면, 비록 대선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던 계층도 훼손된 국가적 기능의 정상화를 요구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는 점이 수치에 반영되었던 게 아닌가 한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 하락이 제1야당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도 당분간 지켜볼 대목이다. 자유한국당은 파행적 국정운영의 당사자로 ‘집권 자격’의 문제를 의심받고 있다. 2020년을 경유하면서 야권 전반이 이런 저런 정계개편의 과정을 거치게 되겠지만 이런 상태라면 성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진보정당인 정의당으로 일부 지지층이 이동한 측면이 눈에 띈다. 노회찬 의원의 사망 이후에 기존의 진보적 유권자층을 넘어 중도층 일부까지 정의당을 지지하는 흐름이 강화된 것으로도 보인다. 정책과 노선을 둘러싼 본격적 논쟁이 시작되면 조정 국면은 피할 수 없을테지만 향후의 정치 지형이 중도적 정부 여당과 진보적 야당이라는 구도로 재편된다면 한국 정치 전반에는 그 이상 좋을 일이 없을 것이다.

다만 정치 세력 간 지형의 변화가 유권자 층의 변화와 일치하느냐는 두고 볼 문제다. 현대정치에서 반복되는 교훈은 정치 세력 간 관계의 변화를 유권자들의 성향 변화와 혼동할 경우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한 파국을 맞게 될 수 있다는 거다. 지금처럼 보수야당의 범야권과 진보-중도적인 범여권의 대결구도가 붕괴한다고 해서 한국 유권자들의 이념지형이 중도 대 진보로 변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걸까?

문재인 정권 들어 눈에 띄게 빈번해지는 ‘신호’들은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암호화폐, 남북단일팀, 입시제도, 난민, 전기요금 누진제 등에 대한 논란이 그렇다. 불만에 찬 대중이 바라는 것은 언뜻 보기에 시장원리의 확대인 것 같다. 앞서의 쟁점에서 두드러진 요구가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고 노력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요구의 이면에는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은 보잘 것 없는 보상에 만족해야하고, 그 이상을 바라는 ‘무임승차자’는 응징과 배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자유한국당의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느닷없이 ‘국가주의’ 프레임을 들고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재인 정권의 접근법은 국가가 나서서 격차를 해소하는 인위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자신들은 민간 자율에 맡기는 ‘자율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율주의’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제기한 정치철학과는 관계가 없고, 지금까지 ‘신자유주의’로 불려온 정책 노선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런 시도가 당장 어떤 정치적 성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적어도 분명한 건 김병준식 접근법이 어쨌든 지금의 정치적 한계 내에서 우파가 취할 수 있는 정공법에 해당할 수는 있다는 거다. 굳이 자유한국당이 내세우고 있어서 반향이 없는 것이지, 메시지 자체는 무시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 않나 한다.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회원들이 7월 10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국민연금 급여인상 사회적 논의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이런 구도는 반복되고 있다.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원회가 국민연금 보험료율 인상과 가입 연령 상향을 논의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반발이 커지는 걸 보면 그렇다.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의 안은 저출산 고령화로 연기금 고갈 시점이 애초 계산보다 빨라졌다는 평가를 근거로 한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는 우리 사회가 복지제도로 감당해야 할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꼭 국민연금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이 조건은 당분간 변하지 않을 전망이다. 국민연금은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따졌을 때 낸 돈보다 많이 돌려받도록 설계돼있다. 이런 조건을 종합하면 연기금의 고갈은 어느 시점이든 예정돼있을 수밖에 없다. 이 시점을 경과하기 전에 적립식에서 부과식으로의 변경 등이 불가피하다는 게 지금까지 되풀이 되어 온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제도발전위의 안을 놓고 연금을 더 많이 더 오래 내라는 것이냐는 반발이 나오지만, 국민연금의 특성상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더 내면 돌려받는 액수가 늘어나는 측면도 있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다. 그 외에 이런 저런 쟁점이 있지만 핵심을 간추리면 더 내고 더 받느냐, 덜 내고 덜 받느냐의 문제로 수렴된다. 만일 국민연금 개혁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면 이 대목에서 이뤄져야 한다. 덜 내고 덜 받는 방식이 선택된다면 이를 보완할만한 다른 복지제도의 강화와 노동조건의 변화도 함께 고려하는 게 올바른 방향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발은 이런 논의와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크게 나누자면 두 가지다. 하나는 국가가 시키는 대로 연금을 꼬박꼬박 내왔고 노후보장을 기대하고 있는데 연금 지급 연령을 늦추면 상대적으로 손해라는 중장년층의 반발이다. 다른 하나는 연기금 고갈로 국민연금의 혜택을 아예 받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데 누구를 위해서 연금을 내겠느냐는 상대적으로 젊은층의 반발이다. 이 두 가지 정서가 뒤섞여 ‘국민연금 폐지론’으로 분출되고 있다.

사람들이 바라는대로 국민연금을 없애버리면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국민연금의 절반을 부담해 온 기업이다. 국민연금의 틀을 벗어나 각자도생하면 살아남는 것은 상대적으로 풍족한 사람들이다. 즉, 국민연금 폐지론은 시장원리 강화 요구라는 맥락으로 봐야 한다. 심지어 자영업자들은 이런 구도 안에서조차 소외된 채로 ‘국민연금 폐지론’에 심정적 동의를 표하는 상황이다.

보수언론의 ‘공포마케팅’은 국민연금 폐지론에 불이 붙는 주요 통로 중 하나인데, 요즘에는 한 발 더 나가는 분위기다. 문재인 정권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수익률이 급격히 떨어졌고 이것이 연기금 고갈을 앞당기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연금공단이 전주로 이전해 인력이 이탈한 게 문제라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당장 국민연금 기금운용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은 있을 수 있지만 수익률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평가할 일이다. 연기금 수익률 제고의 고전적 논리는 좀 더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라는 거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란 얘긴데, 금융자본 입장에선 좋은 얘기지만 국민이 낸 연금을 투자에 함부로 동원한다는 비판과는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보도하는 것은 국민연금에 대한 불만을 정파적 방식으로 소화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란은 다수의 국민들이 현실의 불만을 해소할 방법을 시장원리 확대에서 찾고 보수세력이 이를 추동하며 정부 여당의 중도적 부위는 이에 무력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진보적인 정치가 적절한 총체적 대안을 내놓고 호소하지 않으면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무게추가 급격히 쏠릴 수 있다. 일희일비 하거나 조급해하는 게 아니라 흔들림 없는 장기적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