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기를 틀어놓았나”

보다 못한 백원우 민주당 의원이 혼잣말처럼 내뱉었습니다.

23일 열린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조 후보자가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의 근거를 묻는 민주당 의원들의 공세에 똑같은 말만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끈질긴 건 민주당 의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조 후보는 한 수 위였습니다.

▲ 2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조현오 경찰청장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조 내정자가 안경률 행안위위원장에게 서약서를 제출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체 차명계좌는 어디서 확인하고 한 말입니까.”
“제가 드릴 말씀이 아닙니다.”
“뭐가 송구스럽다는 건지 말을 해봐요.”
“제가 발언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차명계좌가 있다는 걸 부인하지 않는 건가요.”
“제가 언급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결국, 백원우 의원이 폭발했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고성을 질렀습니다.

“이렇게 아무 답변도 안할 거면 대체 청문회를 왜 합니까.”

한나라당 의원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편이 되어 달라는 것이죠. 하지만 한나라당 의원들은 “발언 하잖아요”라며 조 후보를 거들었습니다. 백원우 의원이 “대체 무슨 발언을 했다는 겁니까”라며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여봤지만 큰 소용은 없었습니다.

청문회는 계속 진행됐습니다.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유족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다”는 말 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민주당 의원들이 작심한 듯 차명계좌 발언의 실체를 파헤치려 해보았지만 조 후보자 역시 작심한 듯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전 청문회 질의가 끝난 뒤 저는 일찍 청문회장을 떠났습니다. 뭔가 새로운 의혹이 속 시원하게 밝혀진다면 보도를 크게 해야하는데 새로운 내용은 별로 없었습니다.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어 보였습니다.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한 앵무새 답변에 아마 많은 국민들이 실망했을 겁니다.

쌍용차 진압, 자랑스러울 일인가

그런데 조현오 후보자의 불성실한 청문회 태도 못지 않게 저를 크게 실망시켰던 것은 조 후보자의 쌍용자동차 진압과 관련한 인식이었습니다. 그는 이날 청문회에 출석해 쌍용자동차 노조 과잉 진압을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꼽았습니다.

“우리 경찰을 ‘선진 일류경찰’로 만들어 가는데 소중한 자양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순간 제 귀가 의심스러웠습니다.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노조원 진압은 어쩔 수 없는 경찰의 책무였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은 분들에게는 사과 드린다”는 취지의 발언을 할 거라고 예상했거든요. 적어도 다양한 성향의 국민을 아우러야 하는 경찰청장 내정자라면 최대한 중립적으로 말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은 벗어났습니다.

조승수 진보신당 의원이 “지금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피해자들이 있는데 그것을 가장 자랑스러운 일로 얘기하는 것이 맞는 태도냐”고 지적했지만, 조현오 후보자는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조 의원이 정치적인 판단으로 조 후보자를 지적한 건 아니었다고 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 듯 쌍용자동차 진압은 경찰의 공무집행 범위를 벗어난 명백한 과잉진압이었습니다. 크게 팩트였습니다.

▲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가 2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경찰청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해 8월 5일 새벽. 저는 쌍용자동차 노조원의 옥쇄파업을 보름 간 동행취재하다 보았던 그 장면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특공대원들이 컨테이너를 타고 조립공장 옥상으로 올라오자 노동자들을 닥치는 대로 폭행하던 그 장면을요.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불가피한 물리적 충돌이 아니었습니다. 특공대원들은 경찰에 제압당해 땅에 쓰러져 있는 노동자들을 무차별 폭행했습니다. 방패로 머리를 찍고, 곤봉으로 때리고, 고무총을 발사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기자들의 카메라에 잡힌 경찰의 ‘노동자 폭행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는 당시의 진압을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꼽았습니다. 이건 경찰청장 후보자로서는 적절한 인식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머리를 숙여 사과를 해도 모자른 일을 자랑스럽게 인식한다는 건, 앞으로도 조 후보자가 경찰청장에 임명되면 똑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천정배 민주당 의원은 이날 성명을 내어 “경악할만할 발언”이라고 비판했더군요. 동감입니다. 과연 우리 민주 경찰, 인권 경찰의 수장이 내뱉을 수 있는 발언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는 청와대의 큰 신임을 받고 있고 여당에서도 큰 반대의 기류가 없으니 아마도 경찰청장이 되시겠지요. 조 후보자께 이런 말씀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당시 경찰에게 폭행당했던 노동자들을 얼마 전 만나고 왔습니다. 아직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악몽에 시달리고, 지금도 치료를 받느라 일자리도 못 구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이 어제 조 후보자의 말을 직접 들었다면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부디 국민을 아래로부터 섬기는 훌륭한 경찰청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찰청장에 임명된 후에라도 요즘 왜 상당수의 국민들이 우리 경찰을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 그 뜻을 늘 겸허하게 살펴봐주시기를 바랍니다.

현재 한겨레 방송부문 뉴스팀에서 취재를 하고 있는 기자다.
영상 카메라와 취재수첩을 함께 들고 현장을 누비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앞선 멀티형 기자가 돼려고 노력중이다. 우리 사회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을 감시하는 사명을 놓는 그 순간, 기자가 아닌 단순 직장인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산다. 그저 그런 기자가 되느니 문제적 기자가 되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하고 살기도 한다. 한겨레와 한겨레 독자들을 무지지 사랑한다. 개인 블로그 http://blog.hani.co.kr/catalu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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