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수원역 앞 광장에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 ‘수원촛불’이라 불리는 시민사회단체 연합 모임이다. 자연스럽게 역 주변에서 사진을 전시하고 선전물을 돌리고 서명을 받는다. 모인 이유도 가지가지다. 4대강 반대, 천안함 진실 규명, 철거민 문제,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 장애인 문제… 역 광장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평화롭게 자기가 소속된 단체를 위해 활동하던 사람들이 저녁 7시 무렵이 되면 한 쪽에 모여 앉아 집회를 연다. 그렇게 지켜온 ‘촛불’이 벌써 백 스무 차례를 넘었다. 노래와 율동 공연을 함께 즐기고, 각 단체 사람들이 차례로 나와 발언을 한다. 서명과 모금운동도 즉석에서 이뤄진다.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자발적인 연대가, 끈끈한 소통이 촛불처럼 피어오른다.

▲ 솔로이스트(스티브 로페즈, 2009)
‘수원촛불’에서 KBS 새노조의 파업 소식을 전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처음엔 망설였다. 과연 얼마나 모일까, 시민들이 호응해줄까, 그곳에서 KBS 새노조의 파업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게 쓸모 있는 일일까, 괜한 걸음을 하는 건 아닌가, 짧은 시간에 여러 복잡한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집회가 시작된 지 10분도 채 안 돼 그런 걱정이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들은 노련했고, 무엇보다 절박했다. 절박함이 노련함을 키운 것이리라. 자기 차례가 돌아오면 저마다 이 사회가 잊고 있는, 잊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힘주어 말했다. 가슴 깊이 응어리진 분노로 점철된 그들의 언어에는 사실과 진실이 담겨 있었다. 어느 틈엔가 우리가 잃어버린 정의와 양심을 깨우고 되살리라는 간절한 호소가 있었다. 부끄러웠다. 우리의 절박함은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들에게 우리는 이해와 관심을, 지지를 구하고 있었다. 그들이 목이 터져라 싸우고 외치며 언론의 관심과 보도를 간절히 바라고 원할 때, 나는 어디에 있었던가. 저들의 외침을 그동안 나는 과연 몇 번이나 진정성 있게 취재하고 뉴스에 담아냈던가.

쉰을 갓 넘긴 검은 피부의 부랑자, 두 줄짜리 바이올린을 켜는 거리의 악사, 어느 칼럼니스트의 수첩에 ‘바이올린 맨’이란 이름으로 등록된 사람… 줄리어드 음대에 입학할 만큼 특별한 재능을 가진 그가 피해망상 정신분열증 때문에 음악가의 꿈을 접고 이후 30년을 거리에서 떠돌며 살았다?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저널리즘의 황금률을 신봉하는 신문 칼럼니스트에게 이 흥미로운 남자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대박 기삿감’이었다. 어느 특별한 노숙자의 이 특별한 사연은 ‘두 줄의 현 위에 세상을 올려놓은 사나이’란 제목이 붙은 신문 칼럼으로 씌어졌고, 칼럼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뜨거웠다. “용기와 품위와 손상되지 않은 영혼을 지닌 채 좌절하지 않고 살아온 한 남자”에 감동받은 독자들이 앞 다퉈 악기를 보냈다. 거리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악기가 생겼다. <로스엔젤레스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스티브 로페즈가 ‘바이올린 맨’ 나다니엘 앤서니 아이어스에 관해 쓴 칼럼은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과 더불어 나다니엘의 삶이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열 편 넘게 씌어졌다. 칼럼은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더 나아가 노숙자와 빈민가 정책을 책임진 로스엔젤레스 시장의 마음까지 움직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여기서 그냥 끝나버렸다면 노숙자와 칼럼니스트의 특별한 만남은 아무런 감동도 자아내지 못했을 거고, 이 책 또한 씌어지지 않았을 게다. 나다니엘을 변화시켜보려는 로페즈의 노력과 좌절이 교차하는 과정은 저널리스트이기 전에 한 인간이 타인을 향해 기울이는 지속성 있는 관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다. 누군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살려달라고 절규하고 호소하고 몸부림칠 때, 아니 그럴 힘도 희망도 없는 이들이 거리의 어느 음침한 구석에 버려져 방치돼 있을 때, 나는, 우리는 그들을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돌아보았던가. 진정성에 기반을 둔 연대와 ‘소통’이라는 이름의 끈끈한 공동체의식은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아는 그 마음자리에서 나오는 것임을 이 영화는 가르쳐준다. 부끄러움을 알 때, 저널리스트의 고뇌는 값지다. “나다니엘에 대해 쓴 모든 기사는 극히 개인적인데도 나는 그 이야기를 수천 명의 독자들과 나눴다. 내가 나다니엘을 착취한 걸까? 나다니엘을 착취하지 않고도 계속해서 그에 대한 기사를 쓴다는 게 가능한가?”

▲ 칼럼니스트 스티브 로페즈와 ‘바이올린 맨´ 나다니엘 앤서니 아이어스
사실을 가리고 진실을 못 본 체하는 언론이 반대로 시민사회에 이해를 구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은 한없는 부끄러움으로 우리를 몰아갔다. 부끄럽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한 달 가까이 이어진 새노조의 파업 투쟁은 무려 120회를 넘어선 ‘수원촛불’의 끈기와 열정 앞에서 너무나도 초라했다. 그렇게 파업은 끝났고, 우리는 일터로 돌아왔다. 나다니엘에게 일정하게 머물 곳을 마련해주고, 정기적으로 음악 수업을 받게 해주고, 가족과 재회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데 성공한 로페즈조차도 체계적인 약물 치료를 거부하며 공격적으로 변하는 나다니엘의 예측불허 태도 앞에서는 숱한 실망과 좌절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다니엘의 삶이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었던 건 이제 그가 더는 혼자가 아니라는 데 있다. 관심, 사랑, 헌신, 우정, 그리고 희망…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한 하찮은 삶은 어디에도 없다. 이 사람 냄새 풀풀 나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한때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큰 꿈을 한 번쯤 가슴에 품었을, 그러나 언제부턴가 순한 양처럼 주어진 현실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고 마는 수많은 저널리스트의 ‘굳은 마음’에 잔잔한 균열을 일으킨다. 그래서 아직은 믿고 싶다. 내가 기울이는 작은 관심이 세상을 보다 살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을. 그런 관심이 절실한 이들을 향해 스스로를 낮춰 세상을 볼 때 이 팍팍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참된 희망이 보인다는 것을.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