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호 선생이 있다. 옥천군 청산면에서 태어났다. 일제 식민지로 완전히 떨어진 후 서울로 배움길에 나섰다가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난다. 의기투합이 된 두 사람은 1914년 중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이어 조동호 선생과 여운형 선생 등 독립지사들은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에 중요한 구실을 한 신한청년당을 창립한다. 이를 모태로 독립운동이 활발해지고 1919년 일본에서 있었던 2.8독립선언과 아울러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한 삼일만세운동을 촉발하는 계기를 만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으로 활동했고, 특히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만들 때 활자체를 고안해 신문을 내고 항일정신을 널리 퍼지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1920년대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1936년 동아일보에 열흘 앞서 베를린올림픽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조선중앙일보의 실질적인 운영자였다. 1944년에는 여운형 선생과 함께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을, 1945년 해방이 되자마다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몽양 여운형 선생과 함께 평생동지로, 독립을 위해 싸웠다.

김규흥 선생은 근대화시기 옥천읍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인 사립 창명학교를 세워 운영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해 1911년 시작되어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신해혁명에 참여하고, 이후 독립지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근거 마련을 위한 은행 설립, 운영과 초기 독립운동 토대 구실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의 행적이 좀더 세밀하게 연구되면 초기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는 새로 쓰여져야 할 정도로 선생의 독립운동 궤적은 뚜렷하다.

▲ 고 육영수 여사 36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참배객들이 여사의 동상 앞에 헌화하기 전 묵념을 하고 있다. ⓒ옥천신문
1919년 옥천군 이원면 수묵리를 시작으로 이원장터에서 거대한 만세시위가 일어난다. 육창주, 허상기, 허상구, 김용이 등 독립지사들이 앞장서 이끈 대열은 당시 일본 주재소를 파괴하면서까지 연행된 이들을 구해내기도 하는 등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수 명의 순국자가 발생했다.

청산면에서도 만세시위는 치열했다. 김인수, 김철수 등 독립지사들이 순국한 현장에서는 미리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독립운동이었다.

군서면 하동리 만세봉에서는 김순구 선생과 주민들이 짚더미로 횃불을 만들어 만세를 부르며 독립의지를 알렸다. 주동자 김순구 선생은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고 말았다.

1920년대 전좌한 선생은 사제폭탄을 만들어 조선총독부를 공격하려다 붙잡혀 옥고를 치렀고, 최근까지 생존했던 유재영 선생은 옥천군수의 친일행위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내는 의협심을 보였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온 국민의 애창곡 ‘향수’를 지은 정지용 시인 역시 자신이 다니던 휘문고보에서 일제를 비판하고 학교 시설을 개선하라는 요구를 공개적으로 하다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이밖에 옥천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대라면 훨씬 더 많다.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온전하게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옥천군내에서도 이 많은 사람들이 사서 고생을 한 것이다.

8월15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다.

1910년 경술국치로부터 36년, 1905년 을사늑약 이후 41년만이다.

이후 대한민국 역사는 친일 부역세력이 청산되지 않고 기득권을 강화해가며 사회경제적 우월한 지위를 그대로 누리고 이어져왔다.

이승만 정권과 그에 빌붙은 친일세력에 의해 반민족행위 처벌법과 반민족행위자를 가려내 처벌하기 위한 반민특위가 무력화되면서 친일잔재 청산은 물 건너갔다. 2009년말 민족문제연구소가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고 친일인사 명단을 발표하기까지 해방 후 무려 64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기초작업인 친일행위자 조사작업이 해방된 지 64년이 돼서야 가능했던 나라. 친일파 자손들이 재산을 찾겠다고 뻔뻔하게 재판을 거는 나라. 이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한 채 잘못된 토대 위에 이루어진 그 어떤 문명과 경제발전도 사상누각이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나라를 되찾겠다고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 독립투쟁을 펼쳐왔던 독립운동가들과 후손들은 자수성가하기도 어려운 현실에 떨어도 도외시되고, 해방 후까지 국적마저 되찾지 못하는 현실과는 달리 일제에 빌붙어 떵떵거렸던 모리배와 그 후손들은 배를 두드리며 잘 살아왔다.

나라가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는 것은, 진정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평생을 살았던 이들을 모독하는 것이고, 독립국가 국민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현실만 만들어내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광복절하면 전국방송이나 신문에 나오는 천안 독립기념관 기념행사 자리에서 남북관계나 일본에 대한 몇 마디 대통령 담화만 대문짝만하게 언론에 난다. 아니나다를까 올해도 ‘통일세’ 얘기로 대통령은 히트를 치고 있다.

▲ 2000년 8월19일 '조선일보바로보기옥천시민모임'이 공식 출범했다. ⓒ옥천신문
옥천의 광복절 역시 마찬가지다.

광복절 기념식은 중앙정부가 주관하는 행사만 있는 것으로 무심코 지나버린다.

옥천의 8월15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의 추모제가 관심 속에 올려진다.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육영수 여사 추모제를 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그러나 옥천군내만 봐도 많은 선조들이 나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공식 행사 하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없으면 지금부터라도 만들어야 한다.

육영수 여사를 추모하는 분위기에 시비 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추모는 해야 하는 것이고, 오해는 마시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육영수 여사에 대한 부정적인 논지가 나가면 손가락질 당하기 십상인 분위기가 아직도 옥천 땅에서는 있다. 그걸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서 추모제는 추모제대로 하더라도, 수십 억원을 들여 육 여사가 태어난 생가를 복원하더라도, 나라가 해방된 날을 기리고,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위로하는 자리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2000년 8월15일 조선일보바로보기 옥천시민모임이 탄생했던 때를 기억한다. 옥천읍 체육공원 정지용 시인의 흉상 앞에서 일제 당시 친일행위에 앞장섰던 조선일보로부터의 옥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된 조선일보 바로보기운동은 이전 지식인운동을 언론수용자운동으로 확산시킨 전례를 갖고 있다. 그 모임이 언론문화제의 모태가 되었는데 기실 지금은 언론문화제를 광복절에 하지 않으니 그 의미를 찾는 일은 더욱 관심 밖이 되었다.

군 예산이 얼마나 들고 하는가의 문제는 기실 아주 작은 문제다.

나라를 위해 타국 땅에서 오직 후손들이 제 나라에서 온전히 잘 살도록 하기 위해 토대를 닦은 독립운동가를 예우해야, 우리 스스로의 자존감은 높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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