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죽게 될 날도 머지않은 듯 합니다. 43회 예고편에서는 영수군이 사망하고 훗날 영조가 될 연잉군이 태어나 벌써 5살 정도는 되어 보였는데요. 원래 역사상으로는 인현왕후가 복귀되던 해 연잉군이 태어나지만, 이미 동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아귀가 맞지가 않아 현재 정확한 년도를 예측하기는 쉽지가 않네요.

일단 드라마 상에서는 갑술환국과 인현왕후 복귀가 1694년이고, 이후 영수군이 태어나 죽은 뒤 동이가 사가로 나가게 되는 것이 1년 뒤인 1695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6년 뒤로 넘어간다고 하니까 예고에서 보여졌던 동이가 이금(연잉군)을 부르는 장면은 1701년이 되겠지요. 그리고 장희빈과 인현왕후는 1701년에 그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동이 속 연잉군과 역사 속 연잉군의 차이점은?

현재 드라마 동이에서는 검계 사건과 맞물려 동이가 자신의 성인 최씨를 되찾는 과정에서, 대신들의 반발과 민심을 잃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숙종이 동이를 멀리하고 사가로 동이를 내보내게 되는데요. 이후 이금(연잉군)을 회임하고 출산하여 사가에서 키우는 것으로 나오지만, 역사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이금은 이미 인현왕후가 복귀하는 해 태어났고, 이금 출산과 관련하여 숙종은 크게 기뻐하며 호산청(護産廳, 왕비 미만의 후궁들이 출산할 때 출산을 돕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의 관계자들을 푸짐하게 포상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요. 왕자를 생산한 대가로 포상은 당연할 수 있지만, 포상의 범위와 액수가 지나치게 과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숙종은 호산청에 배치된 의원들과 내관들에게까지 내구마(內廏馬)를 하사하였는데, 내구마는 임금이 사용하는 말로서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직속의 관용차량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장관들이라고 해도 적지 않은 성과가 있어야 탈까 말까한 것을 청소원이나 주방아줌마들에게까지 하사한 것이라, 조정이 들끓으며 반대했지만 숙종은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역사에서 이금은 궁궐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에는 궁궐에서 살면서 6세(1699년, 숙종 25) 때 연잉군으로 봉해졌는데요. 실제로 숙종이 연잉군에게 사가를 내어준 것은 가례를 올리고 난 뒤인 11세(1704년, 숙종 30) 때 입니다.

숙종의 연잉군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고 전해지는데요. 숙종실록 39권 30년(1704 갑신년) 2월 21일 2번 째 기사에서 따르면, 당시 11세이던 영조가 가례를 치렀는데 '이 혼인은 사치가 법도를 넘어 비용이 만금(萬金)으로 헤아릴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게 후궁의 소생에 지나지 않는 연잉군의 가례가 세자의 가례를 초월할 정도로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던 것은, 숙종이 연잉군을 후계자로 염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요. 실제로 숙종은 장희빈이 죽은 뒤 세자가 그 충격으로 병을 얻어 자식을 낳지 못하자, 숙종은 경종의 대를 연잉군으로 잇게 하라고 좌의정 이이명에게 명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드라마 동이에서는 아직 숙빈도 되지 못한 동이를 구하기 위해 사가로 내보내면서, 숙종이 어쩔 수 없이 동이를 멀리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수군을 회임할 때도 주막에서 역사(?)가 이루어지더니, 예고에서 숙종이 동이의 사가에 술먹고 만취된 상태에서 동이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왔는데요. 또 그렇게 역사(?)는 궁궐 밖 사가에서 이루어져서 연잉군이 탄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영조임금(연잉군)은 위민사상을 실천한 왕으로 백성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왕이기도 한데요. 백성을 위해 수리 시설을 설치하여 농업을 발달시켰고, 균역법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세금을 덜어주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사형수에 대해서 초심, 재심, 삼심을 거치게 하는 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신중을 기하였으며,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게 했는데요. 1763년에는 일본으로부터 고구마를 들여와서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식량 조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드라마 동이에서는 그런 영조임금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궁궐이 아닌 사가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백성들과 어울려 지냈던 그 경험과 천민의 애환을 아는 동이의 교육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으로 그리려는 것 같은데요. 역사적 사실과 혼동되지는 말아야 겠지요.

장희빈의 나비 열쇠패가 의미하는 것은?

숙종은 숙빈최씨를 상당히 총애하고 많이 사랑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장희빈 사후에는 숙빈최씨를 멀리 했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요.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남인을 숙청하는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숙빈최씨였기 때문입니다. 인현왕후는 1701년 병을 얻어 죽게 되는데요. 숙빈최씨는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주살을 한다는 이야기를 숙종에게 전함으로서, 결국 장희빈에게는 사약까지 내려지고 그 일을 계기로 남인들은 숙청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드라마 동이에서는 동이가 상당히 정의로운 것으로 나오는데요. 장희빈과 적대적인 관계로 대치하고 있는 것 역시, 동이가 정치적인 색깔을 뛰는 것이 아니라 장희빈이 변해서 올바른 길을 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장희빈의 죽음에 동이가 직접적으로 관련되기는 상당히 애매한 점이 있는데요. 자신을 곤경에 처하게 했던 유상궁 등도 죽이지 않고 용서를 했던 정의로운 동이가, 장희빈의 악행을 밝혀내는 것을 넘어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이미지상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명분이 바로 부지수불여공대천(父之讐弗與共戴天),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인데요. 수신호의 비밀을 알게 된 동이는 그것이 오태석을 가리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어릴 적 그 수신호를 사용했던 궁녀가 장희빈이었다는 것을 나비 열쇠패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그렇게 동이는 오태석과 장희빈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워 죽음에 이르게 한 원수임을 알고 용서할 수 없다고 다짐하는데요.

나비 열쇠패는 그렇게 장희빈에게 있어 동이와 불구대천의 원수임을 증명해주며, 결과적으로 장희빈의 죽음을 암시하는 매개체로 활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열쇠패가 나비인 이유는 호접지몽에서 그 의미를 따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장자의 제물론편에 나오는 그 호접지몽은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하기도 하는데, 장희빈이 욕심을 부리고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려 악행을 일삼던 삶에 대해서 일장춘몽을 의미하는 것만 같습니다.

암튼 그렇게 동이는 이제 장희빈과의 마지막 승부도 머지않은 것 같은데요. 인현왕후가 단순히 병사로 죽는 것으로 그려질지, 아니면 역사대로 장희빈의 저주에 의해 죽는 것으로 그려질지 상당히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장희빈은 동이가 영수군을 낳은 이후 어머니 윤씨와 취선당 나인들이 저주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낸 적이 있는데요.

그렇게 이병훈 PD는 미신에 기대는 나약한 장희빈 보다는, 차라리 인현왕후를 명성대비 독살했던 것처럼 시해하려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야 명탐정 동이가 다시 한 번 활약을 하면서 장희빈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테니까 말이죠.

"문화평론가, 블로그 http://skagns.tistory.com 을 운영하고 있다. 3차원적인 시선으로 문화연예 전반에 담긴 그 의미를 분석하고 숨겨진 진의를 파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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