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위안부를 다룬 대다수 작품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과거 겪었던 피해상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선정성 혹은 민족적, 정치적인 색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실제 종군 위안부 여성이 일본군에게 당했던 피해가 영화, 드라마 속 장면에 비해 훨씬 더 참혹했다고 하지만, 굳이 위안부들이 겪은 참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아도 할머니들의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방식은 얼마든지 있어 보였다.

다행히, 지난해 개봉한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2017)를 시작으로 지난 6월 개봉한 민규동 감독의 <허스토리>(2018)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들 겪은 참혹한 과거를 재현하지 않는다. <아이 캔 스피크>는 어린 시절 위안부로 끌려간 주인공 나옥분(나문희 분)의 과거가 잠깐 등장하지만, <허스토리>는 이마저도 나오지 않는다. 1992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및 여성근로정신대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청구한 ‘관부재판(시노모세키 재판)’에 참여한 피해자들의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허스토리>는 훗날 관부재판을 이끈 원고단장으로 활약하는 문정숙(김희애 분)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실제 관부재판을 이끌었던 김문숙 현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회장을 모델로 한 문정숙은 일본인을 주고객으로 하는 여행사 대표로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하는 속물근성 강한 여걸로 등장한다. 일본인을 상대로 기생 관광을 하다가 영업정지를 받게 된 정숙은 여성사업가모임을 통해 친분을 쌓은 신 사장(김선영 분)의 권유로 부산 정신대 대책 협의회 회장을 맡게 된다. 억지로 떠맡게 된 자리이지만 나름 최선을 다하며 활동하던 중, 수십 년 동안 자기 집에서 가정부로 일한 배정길(김해숙 분)의 과거사를 알게 되면서 돈밖에 모르던 정숙의 인생 또한 180도 바뀌게 된다.

영화 속 문정숙 사장은 자신의 정신대 대책위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과거 위안소 주인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에게 “같은 여자로서 부끄럽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종종 한다. 다소 작위적으로 들리는 이 대사는, 사업을 위해 성매매를 묵인했던 정숙 자신의 과거를 자책하는 참회성 발언이다. 하지만, 여성을 강조하는 정숙의 워딩은 관부 재판이 위안부 재판이자 여성들의 연대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영화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는다.

영화 <허스토리> 스틸 이미지

영화는 극적 완성도에 있어서는 아쉬운 부분이 보인다. 주요 인물들을 보여주고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툭툭 끊어진다는 인상이 강하다. 특히, 속물근성 강한 정숙의 변화가 그리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돈밖에 모르던 정숙이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계기는 오랫동안 가족처럼 생각했던 정길의 과거 때문이었다. 영화 초반에도 잠깐 암시된 바 있는 정숙과 정길의 돈독한 관계를 생각하더라도 정숙의 변화는 너무나도 갑작스럽다.

한편으로 이는 웬만한 남성들보다 부와 권력욕이 강한 캐릭터이지만, 눈앞의 불의에 맞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여장부 정숙의 남다른 배포를 보여주는 극적 설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만 급급하다가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정의의 사도로 변신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영화, 드라마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스테디셀러다. 속물근성 강한 인물들의 변화를 다루는 영화들은 안락한 삶을 버리고 고난의 길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갈등와 번민을 보여주는 데 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다. 그런데 <허스토리>의 정숙은 풍요로운 현실을 포기하는 데 있어 긴 고민 없이 정길을 포함한 위안부, 정신대 피해자들과 진심으로 함께하는 행동에 돌입한다.

영화 <허스토리> 스틸 이미지

정숙의 급작스러운 변화는 정길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와 같은 여성으로서 보내는 연대과 지지에 있어 보인다. 또한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인 대상 성매매를 묵인했던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려는 의식도 엿보인다. 과거의 잘못된 행위가 완전히 잊혀질 수는 없겠지만, 부조리한 행동에 암묵적으로 침묵하고 동의했던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여성의 변화는 위안부 문제를 기존의 남성 중심적 역사의 틀 안에서 벗어나 여성의 시선에서 바라보게 한다.

<허스토리>를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본 여성 영화라고 보기에는 여러 아쉬움이 들 법도 하지만, 이제 첫 삽을 떴을 뿐이다. <허스토리>를 계기로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만으로 그녀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위안부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시도가 많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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